'친구와 술 한 잔' 5만원 위해 시인은 두 달 동안 시를 쓴다

시인들 "시를 쓰면 쓸수록 경제적으로 피폐"
일부 잡지들, 시인들의 시창작·발표 열망 악용

한 시집 전문 서점에 시집이 진열되어 있다. /뉴스1DB

# 어느날 오후 한 계간지로부터 청탁 전화를 받은 시인 K씨. 잡지 수가 줄어들어 청탁을 받는 일도 점점 드물어졌는데 청탁전화가 오니 K시인은 기쁘다. 사는 데 바빠 '저축'해 놓은 시가 없는 K시인은 그때부터 시창작에 돌입한다. 마감까지 두달 동안 K시인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생각뿐이다. 일하는 틈틈이, 출퇴근 때, 퇴근 후와 휴일에는 서재에 틀어박혀 시재(詩材)를 찾느라 바쁘다.

그래 이걸 써볼까. 겨우 시상이 떠올랐다. 그런데 살을 붙이는 단계에서 자꾸 막힌다. 촉수를 세운 상태로 다른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을 보고 읽는다. 연마다 조금씩 머릿속에서 살을 붙인다. 머리에서 구체화한 시를 이번에는 종이에 옮겨본다. 몇 번이나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리듬감을 살피고 맘에 안드는 부분은 다시 쓰고 또다시 쓴다. 그렇게 2개월을 훌쩍 보내고야 겨우 몇 편을 완성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받은 고료는 고작 5만원이다. 2편을 보내 편당 2만5000원을 손에 쥔 것이다. 친구와 술을 곁들여 밥 한 끼 먹으니 돈이 거의 다 날아갔다. 시 쓰는 데는 '수십~수백 시간' 걸렸지만 시로 번 돈을 쓰는 데는 '단 두 시간'이 걸렸다.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경제적으로 어려운 예술인 가운데서도 문학인들은 특히 수입이 적다. 그중에서도 시인들은 특히 더 열악하다. 시를 필요로 하는 수요가 점점 줄어드며, 고료가 10년 전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다. 더구나 원고지 장당 계산하는 소설이나 번역 등과는 달리 편당으로 고료를 계산하는 구조도 시인을 힘들게 한다.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경우 시 한편당 15만원이다. 하지만 창작과비평을 비롯해 10만원 이상의 시 고료를 주는 곳은 전국적으로 4~5군데에 불과할 것이라고 문인들은 말한다. 저렴한 곳은 편당 2~3만원, 2편 묶어 5만원 주는 곳도 있다. 잡지사 형편이 어려우면 고료 대신 잡지를 구독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지 등단한 시인 공모전 참가한 속사정은

지난해 정부가 전국의 예술인을 상대로 한 실태조사에서 예술활동만으로 벌어들인 예술인의 평균 수입은 1255만원이었다. 그중 문학인은 평균 214만원이었다. 이들 문인 중에서도 가장 적은 연봉을 받는 부류가 시인일 것으로 문학계에선 추정한다.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시를 양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거의 모든 시인들이 다른 일을 겸업하며 시를 쓰지만 교수나 교사 등의 안정된 직업이 아닌 이상 역시 생계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이다.

기성 시인이 다시 백일장이나 공모에 기웃거리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지난 6일 강원 화천에서 열린 한 백일장에 지방지로 등단한 지 10년 된 시인이 일반인들과 경쟁해 상금 500만원의 대통령상을 받은 일을 둘러싸고 최근 페이스북에서는 찬반여론이 맞섰다. '불공정한 것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일었지만 이 시인의 입장에 대한 동정론도 대두됐다.

한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방지 출신 시인들의 현황이 어떤 지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도) 지방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아무도 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원고청탁을 주는 곳도 단 한곳도 없었다"면서 "나를 시험하고 타인의 평가를 받을 곳은 공모전 뿐이었으며, 그것은 중요한 생계였다"고 말했다.

또 "2년 동안 시 60여 편, 원고지 30~60매 비평은 30편 넘게 발표했는데 이를 통해 번 원고료는 합쳐 300만원도 안 된다"면서 "생활이 나아지기는커녕 글을 쓸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이어 "시쓰기와 함께 문학과외 혹은 시간강사의 직업을 가져도 생계를 꾸리기가 녹록지 않다"고 전했다.

◇'계량' 힘들어도 시창작은 엄연히 '문화노동행위'

단행본이나 잡지 등 책이 팔리지 않으면서 원고료는 10여년 전에 비해 별반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고료가 인상된다고 해도 시의 경우는 크게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문인들은 본다. 시 창작의 능력 자체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김도언은 "아무리 잘 쓰는 시인이라도 쓸 수 있는 작품 편수에는 제한이 있다"면서 "편당 20만원으로 원고료를 올린다 해도 여전히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이 안된다"고 말했다. "시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희망고문'"이라고 이산하 시인은 잘라 말했다.

하지만 시인들은 그럼에도 시 창작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강정 시인은 "시인들이 소설가에 비해 상대적인 빈곤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편집자나 출판사가 '시는 물리적 노동시간이 소설에 비해 적지 않냐'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막상 시인들도 어느 정도의 보수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창작은 '문화노동행위'로서 평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시에 들어간 노동 또는 품을 계량하는 것은 여전히 까다롭다고 문인들은 판단한다. 이재무 시인은 "시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대상과 감응해 한편 완성하는 경우도, 혹은 몇년에 걸쳐서 제작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회사일이나 다른 일반적인 직업의 일에 몰두하다가 갑자기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면서 "책을 읽고 산책하며 사색하고 이런 과정을 패턴화해서 수행해야 시가 나온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 시인은 "그러므로 만약 시에 들인 노동을 산정하려면 독서행위, 사색과 같은 이런 일련의 과정이 어느 정도라도 노동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이 열악한 시인들을 위해 문학교실 등이 보다 활성화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문인은 "공공기관에서 시인들을 초청해 시민들의 문학적 감성을 높이기 위한 문학교실을 더 많이 연다면 '문화융성'에도 도움이 되고 시인들의 생계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잡지들, 시인의 시창작 열망 악용

시 창작이 경제적으로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상황은 시 저작권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악영향도 불러왔다. 시인들은 어차피 돈이 되지 않기에 표절 문제를 제외하고는 저작권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다른 예술작품과는 달리 시는 개인들이 블로그 등에 옮겨 적는 것이 매우 쉽기에 현재 이름 있는 시인들의 거의 모든 시는 인터넷에 올라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의 존재가 고맙다고 생각해 이를 용인해왔다. 그러나 시인들은 "개인이 아닌 법인이나 단체가 시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안된다"는 입장이다.

최근 시인 몇몇은 "한 문학웹진이 수년간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매년 시 1000편을 게시하고, 올해의 좋은 시 100선을 선정해 출판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시인들의 동의를 제대로 구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시인 권혁웅은 "시인의 저작권을 무시하고, 등단을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는 '등단 장사'를 하거나, 시집을 강매하는 잡지가 많다"면서 "시인의 열망을 이용해 잇속을 채우는 그런 잡지나 단체들은 정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ungaung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