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기한 단축' 반길 줄 알았는데…영세 상인 딜레마[강은성의 감]

플랫폼 규제, 알리테무에게 유리…독과점 고착화 아이러니
티메프 사태 원인은 '부실경영'…규제부터 들이미는 패턴 우려

ⓒ News1 김지영 디자이너

(서울=뉴스1) 강은성 기자 = 티몬과 위메프의 대금정산 지연 사태로 돈을 받지 못한 영세 입점업체들이 줄도산하는 등 피해가 막심합니다. 여행 상품이나 물건 구매 등으로 돈을 떼인 소비자들도 억울할 테지만, 입점 업체의 경우 사업이 망하고 생계가 위협받는 지경이라는 점에서 피해의 정도가 더 깊고 아픕니다.

티메프 사태는 엄연히 큐텐그룹의 방만 경영과 구영배 대표의 잘못된 사업 판단으로 이 지경이 됐습니다. 입점 업체들의 억울함이야 헤아릴 수 없겠지만 기업과 기업 간의 '사적계약'이기 때문에 사실 정부가 해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금으로 이들을 지원한다고 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영세 입점업체의 그 절절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기에 정부와 국회는 발 빠르게 '규제' 방법부터 찾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얘기가 '정산기한 단축'입니다. 티메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60일에 달하는 정산기일로 인해 제때 돈을 받지 못한 영세 입점업체의 자금난이 가중됐다는 분석에 기반한 겁니다.

현행 대규모유통업법상 직접판매 정산기한은 60일, 위탁판매는 40일로 제한돼 있습니다. 티메프는 법적 최대 기한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국회는 정산기한을 15일 이내로 대폭 단축하는 법안을 잇달아 발의하고 있습니다. 앞선 당정협의회에서도 여당 의원들은 정산기한을 최대한 짧게 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정부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티메프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 e커머스와 전자지급결제대행(PG) 업체의 판매대금 별도관리를 의무화 한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그런데 왜일까요. 정산기일을 줄여준다는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에 '정책 수혜자'로 여겨지는 중소 제조사, 판매사, 소상공인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온적입니다. 그간 고통받아 온 영세 입점업체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알았는데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옵니다.

우선 정산기일 단축에 대해 플랫폼 업계를 포함한 벤처, 스타트업계 등에서는 정산기일을 법으로 강제하고 지나치게 단축할 경우 자본력이 있는 대형 플랫폼과 법 적용을 받지 않는 알리, 테무 등 외국 플랫폼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해관계자들이 규제에 반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기계와 영세 입점업체들도 이런 상황을 이해한다는 입장입니다.

정산주기를 줄여주는 것이 당장은 좋아 보일지 몰라도 대형 플랫폼이나 외국 플랫폼 외에 중소 유통 플랫폼이 모두 고사한다면 판매채널이 확 줄어들고 대형, 외국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시장의 독과점 체제가 고착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산기일 단축으로 중소 플랫폼이 연쇄적으로 파산하는 것도 시장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티메프처럼 덩치가 큰 플랫폼이 아니라 하더라도 중소 플랫폼의 연쇄 부도가 일어나면 대금을 못 받고 경영난에 처하는 상황은 영세 입점업체들에 똑같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김동식 인터파크커머스 대표(왼쪽부터)와 구영배 큐텐그룹 대표, 류화현 위메프 대표, 류광진 티몬 대표의 가면을 쓰고 수의를 입은 '티메프 사태' 피해자들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린 '검은우산 집회'에 참가해 책임자들의 구속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2024.8.30/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무엇보다 기업들은 이번 티메프 사태가 '규제'가 없어서 일어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정부와 정치권이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냅니다.

김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최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마련한 토론회에서 "현재 추진 중인 플랫폼 규제 법안들이 입법됐더라도 티메프 사태는 막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티메프 사태는 플랫폼 규제가 약해서가 아니라 부실 경영이 본질인데, 이를 '규제 강화'로만 답을 도출하는 것은 생태계의 악화를 이끌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또한 생태계 변화 속도가 빠른 플랫폼 산업의 경우 기대하던 규제 효과와는 다른 역효과가 날 것도 우려했습니다.

유통업계 관계자 역시 "티메프 사태는 규제로 방지되는 게 아니"라면서 "애초 공정위에서 플랫폼법을 추진하다 좌초된 이유와 마찬가지로 해외 플랫폼은 제재할 방법이 없어 국내 테크산업 경쟁력만 저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선량한 중소기업과 영세 소상공인을 보호하자고 목청을 높이기는 참 쉽습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구영배 큐텐 회장 등 경영진을 국회에 앉혀놓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면 '국민을 대변한다'며 속 시원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놓고 새로운 규제를 만들면 결국 규제에 발목이 잡히는 것은 엉뚱하게도 '보호'하겠다던 혁신산업과 중소기업입니다. 이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제발 정부는 어설픈 지원보다 손톱 밑 가시 같은 규제나 과감히 없애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esth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