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 제1 언어는 수어…기술로 이들이 보는 세상 넓히죠"
[혁신으로 극복하는 장애②] 이큐포올, 아바타 수어번역 제공
오프라인 넘어 웹으로 확대…美 방송통신 업계에서도 러브콜
- 이정후 기자
(서울=뉴스1) 이정후 기자 = "IT 업계에서 20년 넘게 몸담으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블록체인, 메타버스, AI 등 기술은 발전하는데 약자들을 위해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로 뛰어들자고 결심한 게 청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였습니다."
이인규 이큐포올 공동대표는 국내외 IT 기업에서 오랜 기간 몸담은 베테랑이다. 삼성SDS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해 어도비 등 글로벌 기업을 거친 뒤 글로벌 IT 인프라 관리 솔루션 기업 '카세야'(KASEYA)와 방송 솔루션 기업 '나그라'(Nagra)의 한국 지사장을 각각 2년, 5년씩 역임했다.
글로벌 IT 기업에서 임원까지 경험했지만 그는 창업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20년 가까이 IT 업계에 있었는데 지금까지 직접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든 적은 없었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더라고요. 창업할 때는 내 강점을 살려 솔루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표가 눈을 돌린 것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였다. 그가 창업을 결심할 당시 '청각장애'는 그와 접점이 없는 분야였다. 이 대표의 가족, 친척, 친구 중에도 청각장애인은 없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과 기업으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지향하는 소셜벤처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청각장애 분야를 살펴봤는데 다른 장애 유형보다 낙후돼 있었다"며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함께 달성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그렇게 2017년 말 청각장애인을 위한 AI 아바타 수어번역 솔루션을 개발·제공하는 이큐포올을 창업했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등록장애인은 264만 명이다. 그중에서 청각장애인은 43만 명으로 전체의 16.4%를 차지한다. 115만 명에 달하는 지체장애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장애 유형이다.
일반적으로 비장애인은 청각장애인이 한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이 2017년 조사한 한국수어사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필담(글쓰기)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은 전체의 26.9%로 조사됐다. 20대와 30대는 대부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지만 고연령층은 문맹률이 높았다.
이 때문에 청각장애인들에게 제1 언어는 한글(문자)이나 한국어(음성)가 아닌 '한국수어'다. 이달 3일 발표된 최신 조사에서 수어 사용자의 91%는 한국수어를 '청각장애인이 사용하기에 적절한 언어'라고 답변했다. 한글은 3.5%에 불과했다.
이큐포올은 이처럼 한국수어를 주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개발해 제공하고 있다. 의미를 지닌 음성이나 문자 하나하나를 수어로 변환해 이를 시각 정보인 'AI 아바타'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청각장애인이 '수어통' 앱을 설치하면 이를 이용할 수 있다.
현재 해당 솔루션은 국립중앙박물관, SRT 열차 및 역사, 서울 지하철 5호선과 7호선, 8호선에 일부 도입돼 쓰이고 있다. 비장애인에게 제공되는 문자·음성 정보를 AI 아바타가 수어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해당 기술은 화재나 사고와 같은 긴급 상황 발생 시 진가를 발휘한다. 최근에는 민간 기업에서의 도입 요청도 늘어나고 있다.
오프라인 공공 서비스를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 중인 이큐포올은 다음 활동 무대를 인터넷으로 옮기고 있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인터넷에서 '웹 접근성'을 확보해야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정보 격차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큐포올의 AI 아바타는 올해 1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디지털집현전에 웹사이트 기준 처음으로 탑재됐다. 다음 달 말에는 조달청의 디지털서비스몰을 통해 공공 SaaS 서비스로 등재될 예정이다.
웹 접근성이 확보될 경우 AI 아바타의 사용처는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어 사용자의 83%가 의료기관에서 수어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데 웹에 해당 기술이 적용될 경우 QR 코드를 통한 수어 제공도 가능해진다.
이 대표는 "청각장애인에게 SNS 메신저 등을 통해 정보를 전송하려면 웹 접근성이 선행 과제"라며 "수어통 앱은 과도기 과정으로 웹 환경이 갖춰지면 서비스를 웹 중심으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큐포올의 아바타 수어번역 기술은 해외에서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 열린 국제방송기술박람회(NAB)에 참석한 이큐포올은 관련 기술을 선보인 뒤 미국 방송통신 업계의 러브콜을 받아 현지 세일즈에 나서기도 했다.
이달 12일에는 미국방송표준협회(ATSC)가 개최한 차세대 방송 콘퍼런스에 3일간 참가했다. 이큐포올은 이곳에서 미국 대형 방송 그룹사 싱클레어방송그룹의 지상파 방송을 통해 아바타 수어번역 솔루션을 시연했다. 싱클레어방송그룹의 수신기를 보유한 차량이나 가구는 긴급 재난 메시지와 함께 이큐포올의 수어번역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대표는 "미국 방송사를 대상으로 아바타 수어번역 솔루션을 제공하는 계약을 올해 안에 체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큐포올은 미국 진출이 가시화되는 시점을 계기로 본격적인 해외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시기는 계약 성사 이후인 내년 초를 전망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영리기업에 부여하는 글로벌 인증 '비콥'도 획득해 글로벌 투자 유치에 유리한 조건도 갖췄다.
"사업을 시작할 때 청각장애인 43만 명을 위해 사업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시장을 반대로 봤습니다. 43만 명이 아니라 청각장애인도 공정한 기회를 얻길 바라는 우리 모두가 고객인 거죠. 이 때문에 저희는 장애인이나 장애인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는 모델은 만들지 않습니다." 이 대표는 이큐포올의 가치와 비전에 대해 자신 있게 말했다.
leej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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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보통사람'이 다수이기에, 몸이나 지능이 불편한 소수의 장애인은 '보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들도 충분히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지만 그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혁신'이 신체적, 지능적 장애를 메꿔주고 있다. 혁신 기업의 기술과 아이디어가 장애라는 틀에 갇힌 인재들을 사회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 장애를 극복하는 혁신기업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