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법 미루고 총수 화상출석법은 처리…국회에 속타는 재계

계엄사태·탄핵 혼란 속 유탄 맞은 재계…'52시간제 완화' 등 반도체특별법 방치
'증언·감정법' 통과에 한숨…우려 큰 상법개정안 통과 예의주시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박성재 법무부장관과 조지호 경찰청장 탄핵소추안이 상정되고 있다. 2024.12.12/뉴스1 ⓒ News1 이광호 기자

(서울=뉴스1) 김재현 기자 = 12·3 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 후폭풍의 유탄을 맞은 재계의 시름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정치적 혼란 속 업계 숙원 법안은 사실상 방치됐고 원치 않았지만 통과된 법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대통령 재의요구권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혼돈을 틈타 재계가 가장 우려하는 상법 개정안 처리 가능성이 커졌다는 전망도 나온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노사 합의를 전제로 반도체 R&D(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 등을 담은 반도체특별법 논의는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이다. 주 52시간제 예외조항 삽입 여부를 둘러싼 여야 견해차가 큰 상황에서 계엄 사태와 탄핵 국면이 겹치며 뒷전으로 밀린 모양새다.

반도체특별법은 여당인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추진하는 핵심 법안이다. 업종이나 직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주 52시간제도가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반도체 R&D 속도를 더디게 하는 주원인이라는 업계 목소리를 반영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주 52시간제 예외를 둘 경우 노동시장에 불필요한 근로시간 유연화 확산 신호를 줄 수 있고, 최대 64시간 일할 수 있게 하는 특별연장근로 제도도 이미 있다며 반대해 왔다.

속 타는 경제계는 분주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6단체는 전날 남형기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과 규제혁신 간담회를 열고 주 52시간제 예외 등 반도체 규제의 신속한 처리를 요청했다. 경총 등은 이날 오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 민생현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했다.

부정적 전망은 해외에서도 나온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최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자서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의 정치적 혼란이 삼성전자 경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탄핵 국면 등 정치권 갈등이 반도체 기술 발전은 물론 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증언·감정법)도 경제계에 타격이라는 평가다. 재계를 직접 겨냥한 법은 아니지만, 예상되는 우려가 자명하다는 이유에서다.

해당 법안은 국회가 요구하는 모든 자료는 제출해야 하고 증인은 국정감사뿐 아니라 청문회, 각종 안건 심의 때 화상으로라도 출석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특히 자료 제출과 관련해 이를 거부·방해하거나 요구받은 서류를 파기할 경우, 정보를 허위로 제공하는 경우 등은 최대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처벌 규정까지 담겼다.

현장에서는 기업의 영업 비밀이 국회를 통해 공개될 수 있고 불가피한 해외 출장 중에도 총수의 불출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우려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법적 근거가 생기게 되면 무더기 자료 제출 요구로 경영상 기밀이나 고객사와의 계약 내용 등 보안이 필요한 사항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또 국감은 1년에 한 번 정도라지만 청문회나 안건 심의 때로 확대된다면 총수가 국회 일정을 소화하느라 경영 행보에도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했다.

증언·감정법은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오는 21일까지 행사하지 않으면 확정된다. 탄핵 정국 속 여당·정부가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하거나 대통령도 직접 해당 권한을 행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목소리가 크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증언·감정법 시행을 전제로 "국회가 국정감사 등을 위해 기업의 영업 비밀이라도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한 자료는 제출해야 겠지만, 절대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법적 장치도 뒤따라야 할 것"이라며 "총수의 국회 출석 요구도 그동안 보여주기식 관행들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중대한 사안에만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요 그룹 사장단 등 기업인들이 9년 만에 긴급 성명까지 내며 반대했던 상법 개정안은 입법 드라이브 가능성이 점쳐진다. 재계에서는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 국면 사태가 정리되는 직후 상법 개정안을 기습 처리할 수 있다며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다.

해당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게 골자다. 재계는 해당 개정안 통과 후 주주의 이익까지 따져야 할 경우 회사의 경영상 판단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고, 주주에게 반하는 경영상 결정을 했다가 이사들이 줄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개인투자자나 소액투자자들은 신속한 상법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고 지배경영권 남용으로 주식시장 악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국민적 여론도 분명히 있다"는 입장이다.

주요 기업 관계자는 "정치적 혼란 속 기업들이 속내를 밝히긴 어렵겠지만 '내우외환'이라는 것에는 다들 공감할 것"이라며 "나라 안팎의 악재들이 점점 겹치면서 점점 기업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토로했다.

kjh7@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