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측근 "300억 어음, SK가 준 것"…'盧 비자금' 새 국면

윤석천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언론 인터뷰…盧 비자금 SK 유입설 정면반박
최태원·노소영 이혼재판 영향 주목…검찰, 비자금 진위 고발 내용 검토 중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서울=뉴스1) 김재현 기자 =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재판에서 노 관장이 승소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 논란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비자금 의혹을 정면 반박하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최측근의 증언이 나온 데다, 해당 논란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밝혀달라는 검찰 고발도 잇따르면서다.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윤석천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14일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당사자들과 관계가 전혀 없는 어음이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재판에 영향을 줬고, 이로 인해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과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윤 전 실장은 노태우 정부 5년간 제1부속실장을 지냈고 임기 종료 후에도 3년간 노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한 인물이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대통령 임기 중 최종현 회장 간 독대 사실은 일절 없었다"며 "돈을 줬다면, 최종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줬다는 게 상식 아닌가"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이 '전국 국가원수 총회' 기부금을 고민하던 중 또 다른 측근이 "워커힐 사돈이 주겠다고 하신 것 중에서 하나를 헐어서 쓰자"고 제의했는데, 노 전 대통령이 즉답을 피하고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런 정황을 토대로 할 때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메모(선경 300억)와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6장이 찍힌 사진 등은 SK에 건넨 '노태우 비자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SK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300억 원을 건네기 위해 가짜로 만들어 준 증빙'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로 보인다.

윤 전 실장은 해당 어음이 남아 있는 데 대해서는 "1995년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면서 선경(현 SK)에서 받은 어음을 사용할 시기를 놓쳤고 김 여사께서 현재까지 보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문제의 300억 원은 어음 전달을 통한 약속만 이뤄졌을 뿐 한 번도 '이전'되지 않은 실체 없는 돈인 셈이다.

특히 이는 앞서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이 최 회장과 노 관장 이혼소송 재판부에 전달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손 회장은 "청와대에서 기업마다 통치 자금을 마련해 줘야 하는데 선경은 규모상 300억 원 정도는 분담해야 하니 달라고 요청했다"며 "최종현 선대회장이 하는 수 없이 대통령께서 퇴임하고 활동 자금이 필요하실 때 약속한 300억 원을 꼭 드리겠다고 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노태우 비자금' 논란은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불거졌다. 공판 과정에서 노 관장은 1990년대 부친인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 원이 SK에 유입돼 태평양증권 인수와 SK 주식 매입 등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옥숙 여사가 '맡긴 돈'이라고 남긴 메모와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6장이 찍힌 사진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300억 원이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 쪽으로 들어가 그룹 성장의 종잣돈이 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SK 주식을 포함해 최 회장의 모든 재산은 분할 대상이라고 보고 그중 35%인 1조3808억 원과 위자료 20억 원을 노 관장에게 주라고 판결했다. 사돈인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SK가 성장한 만큼 30년 넘는 결혼 생활을 한 딸 노 관장의 기여도 있다는 게 재판부 판단인 셈이다.

이에 따라 1심 판결도 뒤집혔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은 부친인 최종현 회장에게 물려받은 특유재산"이라고 판단했다. 특유재산은 결혼 전 갖고 있던 고유재산인데 배우자가 재산 형성에 기여한 경우 분할 대상이 된다.

최 회장과 SK그룹 측은 2심 재판 과정뿐 아니라 판결 이후에도 적극 반박하고 있다. 최 회장 측은 공판 당시 SK그룹에 비자금이 유입된 적이 없는 데다 300억 원 약속어음은 1995년 노 전 대통령 수사 때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최 회장은 지난 6월 이혼 항소심 판결 이후 기자회견에서 상고 입장을 밝히며 "SK의 성장이 불법적인 비자금과 6공화국의 후광으로 사업을 키워왔다는 판결 내용이 존재하는 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은 적지 않다. 뉴시스가 이날 창간 23주년을 맞아 공개한 노태우 비자금 관련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태우 전 대통령 불법 비자금 처리'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 10명 중 7명(69.2%)은 '엄중히 처벌하고 단죄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는 뉴시스가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8~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다.

검찰 고발도 이어지고 있다. 5·18 기념재단은 이날 노 관장과 김옥숙 여사, 노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을 범죄수익은닉규제법·조세범처벌법 등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노 관장이 이혼소송 2심 재판부에 제출한 김 여사의 메모 등을 고려해 노 전 대통령 일가가 은닉한 비자금을 수사해야 한다는 취지다.

앞서 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이희규 한국노년복지연합 회장은 지난달 19일 노 관장 등을 고발하며 노태우 비자금 진위를 밝혀 국고로 환수해달라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은 범죄수익환수부(부장검사 유민종)에 해당 고발 건을 배당하고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

kjh7@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