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노소영 '세기의 이혼'에 30년 전 '쌍용 비자금 사건' 재소환

노태우, 쌍용에 비자금 200억 전달…대법 "대여금 성격, 현금·이자로 반환하라"
이혼소송 항소심, '쌍용 판례' 인용하면서도 원리금 넘어 재산분할 판결…대법서 盧 일가 기여도 쟁점 전망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6공화국의 후광으로 사업을 키웠다는 판결은 사실이 아니다."(최태원 SK그룹 회장)

"피고 측이 SK그룹의 성장에 기여를 했다고 봄이 타당하다."(서울고법 가사2부)

(서울=뉴스1) 최동현 박종홍 기자 = SK그룹을 재계 서열 2위 기업으로 키워낸 종잣돈이 됐다는 '노태우 300억 비자금'은 투자금일까, 대여금일까.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핵심 쟁점으로 '노(盧)씨 일가의 기여도'가 떠오르면서, 재계에선 과거 고(故)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의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쌍용 비자금 사건'은 1993년 김석원 전 쌍용 회장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비자금 200억 원을 쌍용양회, 쌍용제지, 쌍용자동차 등 그룹 계열사 주식 형태로 관리하다 국가로부터 반환하라는 판결을 받았던 사건이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주식으로 반환하겠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금과 이자를 내라고 판결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비자금 200억 원을 두 차례에 걸쳐 김 전 회장에게 전달하면서 '이 돈을 맡아 적당히 관리하고, 다시 반환을 요구했을 때 이자를 붙여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김 전 회장은 차용증을 써준 뒤 비자금으로 계열사 주식 143만여 주를 사들였고, 4년 뒤인 1996년 해당 주식으로 비자금을 반환하겠다고 했으나 노 전 대통령은 거절했다.

김 전 회장이 비자금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던 동안 주가는 폭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 2628억 원 추징에 나서면서 김 전 회장에게 비자금 200억 원과 이자를 현금으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김 전 회장은 "주식으로 반환하겠다"고 주장했으나 1·2심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고, 2001년 대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확정됐다. 김 전 회장이 투자했던 주식의 가치는 10억 원도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

대법원이 '현금 반환'을 결정한 이유는 비자금의 '성격 규정' 때문이다. 김 전 회장 측 변호인단은 "비자금은 반사회적 행위에 의해 조성된 범죄자금이자 불법원인급여이기 때문에 현금이 아닌 주식으로 반환하는 게 맞는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불법원인급여가 아닌 대여금의 성격으로 봐야 하고, 따라서 원금에 이자를 쳐서 반환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재계에서 이 사건이 재조명된 이유는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등장하는 '노태우 300억 비자금'과 판박이여서다. 김석원 전 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 모두 비자금을 경영 활동에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다만 최 회장 측은 '노태우 정권의 지속적인 요구로 약속어음을 발행해줬을 뿐, 차용증은 물론 실제 300억 원이 유입된 사실이 없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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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노소영 항소심 재판부도 판결문에 과거 대법원의 판례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판사 김시철)는 "1991년경 당시 최종현(선대회장)이 노태우로부터 300억 원 정도의 금전적인 지원을 받은 것 자체가 불법원인급여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이번 이혼소송에서 문제가 된 비자금 300억 원과, 김 전 쌍용 회장의 비자금 200억 원을 유사한 성격으로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 쌍용 사건에서 대법원은 비자금을 이자를 쳐서 되갚으면 되는 '대여금'으로만 봤던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비자금이 그룹 성장에 역할을 했다고 보고 노 관장에 1조 3808억 원의 천문학적 재산을 분할하라고 판결했다는 점이 다른 대목이다. 노태우 일가가 SK그룹 성장에 기여한 종잣돈의 일종으로 본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2심 재판부가 과거 쌍용 비자금 판례를 인용해 '300억 비자금'의 성격을 규정했다면 설령 비자금의 실체가 존재하더라도 대여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라며 "예컨대 지인의 식당 개업에 300만 원을 빌려줬는데 식당이 대박이 나자 '사업 성공에 기여했으니 원리금 이상의 수익을 달라'고 요구하는 꼴"이라고 했다.

반대로 '노태우 일가의 기여도'는 당시 정권의 비호 등 무형적 지원을 포괄한 개념이라 단순히 '300억 비자금' 하나로 따질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은 물론 전날 입장문에서도 "피고 부친(노태우)을 비롯한 피고 측이 2024년 4월 16일까지 원고(최태원)뿐만 아니라 원고 부친(최종현)의 경영 활동까지 계속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적었다.

결국 300억 비자금을 포함한 노태우 일가의 기여도는 대법원에서도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부장판사를 지낸 홍창우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의 기여도는) 결국 유·무형의 도움이 있었는지 가리는 사실 인정의 문제이고, 자녀 세대(최태원-노소영)에 이르러 재산 분할에 관한 기여 평가를 할 수 있는지는 법적 평가의 문제"라며 "주된 쟁점이 될 수 있다"고 봤다.

한편 최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SK의 성장이 불법적인 비자금을 통해서 이뤄졌다, 6공화국의 후광으로 사업을 키워왔다고 선고된 판결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저뿐만 아니라 SK그룹 구성원 모두의 명예와 긍지가 실추되고 훼손됐다고 생각해 상고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dongchoi89@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