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 칼럼] 미국의 안보 청구서 준비
(서울=뉴스1)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 얼마 전 미국의 트럼프 전대통령이 대선후보 경선유세 중에 방위비를 충분히 내지 않는 나토 회원국이 있으면 러시아가 침공하도록 독려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나토 회원국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트럼프의 생각에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요즈음의 지정학적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한 제스처다. 2023년 3월 핀란드에 이어서 2024년 2월 스웨덴의 나토 가입이 결정됨에 따라 발트해가 사실상 나토의 호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토와 떨어져 다른 나라의 영토에 둘러싸인 땅을 월경지(exclave)라고 부르는데 현대 역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월경지는 통일 전 독일의 서베를린이었다. 러시아의 월경지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 연안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에 있다. 지정학적으로는 거의 러시아나 다름없는 벨라루스와 65km 거리에 있는데 칼리닌그라드와 벨라루스 사이의 지역을 수바우키 회랑이라고 부른다.
칼리닌그라드에는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있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나토 회원국이어서 이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다.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가 아니라 석호 안에 있는 항구다. 발틱함대는 바다와 연결 통로가 있는 남쪽 사주의 발티스크에 기지를 둔다.
칼리닌그라드는 프로이센 땅 쾨니히스베르크였다. 독일의 2차 대전 패전으로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칸트가 평생 살던 곳으로 유명하고 수학자 오일러의 일곱 개 다리 문제로도 유명한 곳이다. 소련 시절 리투아니아에 병합될 뻔했는데 러시아화를 겁낸 리투아니아가 손사래를 쳐서 지금처럼 남아있다. 독일도 회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서독 통일의 대가로 영구 포기했다.
칼리닌그라드는 바로 서쪽 이웃의 단치히를 떠올리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되었던 월경지다. 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다. 독일기사단국 – 폴란드 - 프로이센 땅이었다가 1차 대전 후 자유국이 되었던 곳이다. 자유국이지만 독일인들이 사는 사실상 독일 땅이었다.
나치 정부가 들어선 후 독일은 독일과 단치히를 연결하는 회랑지역을 요구했고 폴란드는 거절했다. 독일은 이를 빌미로 1939년에 폴란드를 침공, 단치히를 독일 영토에 편입시켰고 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단치히는 전쟁 후 그단스크로 이름을 회복하고 폴란드에 돌아왔다.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1946년 폴란드는 이 도시에 조선소를 세웠다. 후일 폴란드 민주화의 중심점이 된다.
발트해가 사실상 나토의 호수가 되었지만 칼리닌그라드라도 있으니 러시아는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모면한 셈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뭔가를 도모한다면 독일이 단치히에서 시작해 팽창을 시작했듯이 칼리닌그라드에서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가 발트 3국의 러시아계 국민 탄압 등 명분을 내세워 수바우키 회랑을 전격적으로 점령한다면 발트 3국은 러시아에 포위되는 셈이다. 정치적인 무리수지만 점령에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서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면 서방이 난감해진다. 다음은 발트 3국의 접수다. 러시아는 그렇게 해서라도 발트해를 되찾아 와야 한다. 발트해를 잃는 것은 러시아 역사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그 과정이 성공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더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은 분명하다.
트럼프의 발언이 과격하기는 했지만 유럽 국가들이 일제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유럽 상황과 미국의 고립주의 회귀 움직임은 역사책에서 많이 본 불길한 광경이다. 아시아 지역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일본, 캐나다, 멕시코 외에는 모든 나라와 앞으로는 계산을 똑바로 하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트럼프의 발언은 그 연장선 상에 있다.
bstar@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