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하는 환율·물가에 빨간불 켜진 기업들…"앞으로가 더 무섭다"
고환율에 원가 부담…고물가까지 겹치며 무역수지↓
반도체까지 부진…"외환위기 전에도 막대한 경상적자"
- 문창석 기자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 환율과 물가가 치솟으면서 산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원자재 가격 부담은 높아지는데 소비는 위축되면서 재고가 쌓이고 있다. 한국 경제의 주력인 반도체·철강·화학 등이 동반 부진에 빠지면서 무역수지도 급격히 악화되는 모양새다.
지난달 29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9월 전체 산업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전월보다 3포인트(p) 하락한 78로 집계됐다. 지난해 2월(76) 이후 1년 7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BSI는 현재 기업 경영 상황에 대한 기업가의 판단과 향후 전망을 조사해 지수화한 수치로 100을 밑돌면 그만큼 경기를 비관적으로 보는 기업이 많다는 얘기다.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고환율이 지목된다. 지난달 3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원 환율은 1430.2원으로 마감했는데, 이는 지난해 평균 환율(1144.6원)보다 285.6원(25.0%)이나 상승한 것이다. 28일에는 장중 1442.2원까지 올라 2009년 3월16일(1488.0원) 이후 1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제조기업은 환율이 오른 만큼 원자재를 더 비싼 가격에 수입해야 하는데, 원가 부담이 커지면서 기업 경영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철광석·석탄을 해외에서 달러로 사오는 철강업체,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를 수입하는 화학업체, 리튬 등 원재료의 수입 비중이 높은 배터리업체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제조업 BSI는 74로 코로나19 영향이 한창이었던 2020년 9월(68)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국제 원유를 포함한 수입 원자재 부담이 급증하면서 무역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해외에서 원자재를 조달해 국내에서 재가공한 후 수출하는 비중이 높은 국내 기업의 특성상 원자재 수입 비용 증가가 제조원가 급등으로 이어져 무역수지를 끌어내린 것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8월 수출액은 567억달러, 수입액은 661억달러로 95억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수출입통계 집계를 시작한 1956년 이후 최대 규모다.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6.6% 늘었지만 수입액이 28.2%나 급증한 탓이다.
고물가도 무역수지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장 가동에 필수인 원유·석탄·가스 등 에너지 관련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8월 에너지 수입액은 185억2000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91.8% 증가했다. 8월 전체 수입액의 28%가 에너지 수입에 들어간 것이다. 8월 에너지 수입 증가액(89억달러)은 전체 무역적자액(95억달러)과 맞먹는 규모다.
내수 관점에서도 고물가는 기업의 불안 요소다. 가뜩이나 경기 불황이 이어지고 있는데, 물가 상승세로 소비가 위축되면 침체가 더욱 길어질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08.62로 전년 동기보다 5.7% 상승했다. 올해 초 3%대였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3·4월 4%대, 5월 5%대, 6·7월 6%대까지 치솟았다. 한국은행은 '고인플레이션 지속가능성 점검' 보고서에서 "원자재 가격 반등 가능성과 수요 측 물가 압력 지속 등으로 높은 물가 오름세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믿을 구석'이었던 반도체 업황도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로 흔들리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8월 반도체 수출액은 107억8000만달러로 전년 동월보다 7.8% 줄었다. 반도체 수출이 감소세를 기록한 건 2020년 6월 이후 26개월 만이다.
특히 통계청에 따르면 8월 반도체 생산은 전월 대비 14.2% 감소했다. 2008년 12월(17.5%) 이후 13년 8개월만에 최대 감소 폭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 전체 수출의 20%를 차지한 반도체는 경기 불황 속에서도 수출을 견인하며 버팀목 역할을 했었지만 이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반도체 업황은 4분기에 더욱 안 좋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4분기 D램 가격이 3분기보다 13~18% 하락하고, 같은 기간 낸드플래시 가격도 15~20%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반도체 산업이 3분기보다 부진하면서 연말로 갈수록 무역적자 규모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역적자 확대는 원화 가치 약세로 이어져 이미 고공행진 중인 환율을 더욱 밀어올릴 수 있다. 높은 환율로 원가가 상승해 무역수지 적자 폭이 확대되고, 이는 또다시 환율 상승 압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한국이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던 걸 기억해야 한다"며 "지금은 당시보다 펀더멘털이 훨씬 강해 직접 비교할 순 없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수출시 원화 결제보다 달러 결제 비중을 늘려 환차손을 상쇄하고 달러 차입금 비중을 줄이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외환당국이 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환율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등 해외 사정에 따라 경기 침체가 지금보다 더욱 심화될 수 있다"며 "기업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정부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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