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로스쿨 수석 졸업생이 업계 10위 로펌에 간 이유는

[그린경쟁시대 딥체인지③] 국내 첫 'ESG 자문' 법무법인 지평
사회적 신뢰로 새로운 시장 창출…"착한 로펌이 돈도 많이 번다"

편집자주 ...바야흐로 그린시대다. 환경은 이제 기업에게 ‘보호’를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됐다. 환경(E)과 함께 사회(S)·지배구조(G)는 기업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착한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원한다. 뉴스1은 ‘ESG’ 사례를 살펴보고 기업이 왜 필수 경영 요소로 선택해야 하는지 조명해 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신길역에서 리프트를 이용하려다가 추락사한 장애인 사건을 맡은 사단법인 두루 이상현 변호사가 법원에서 소송 관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지평 제공). ⓒ 뉴스1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동종업계 중 처음으로 시각장애인을 채용했고 전 직원이 점자가 박힌 명함을 쓰고 있다. 갑자기 부모 없이 살게 된 교도소 수용자 자녀에 대해선 '범죄자의 자녀'라는 사회 인식의 개선을 촉구한다. 커피·복사용지·휴지·세정제 같은 사무용품도 인권침해가 이뤄지는 업체 대신 공정무역이나 사회적기업에서 만든 물품만 쓴다.

언뜻 보면 사회적 기업이나 공익단체 같지만, 실제로는 변호사들로 구성된 로펌(법무법인)의 이야기다. 보통 로펌은 돈과 성공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있다. 이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진데, 변호사를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하는 총잡이'라는 의미의 '하이어드 건(Hired Gu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평은 그런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로펌이다. 우선 지난해 9월 '경영 활동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겠다'고 선언한 것부터가 이례적이다. 이는 국내 로펌 중 유일한 사례다. 지난해 소속 변호사들의 공익 활동도 대한변호사협회가 정한 연간 의무 수준(20시간)을 두 배 이상 넘는 1인당 46시간을 했다. 공익 활동에 참여한 변호사도 전체의 92.7%여서, 공익 활동을 많이하는 변호사가 돈 잘 버는 다른 변호사의 의무 공익시간을 대신 채워주는 '공익시간 나눠주기' 논란에서도 자유롭다.

영리조직인 만큼 수익을 위한 법률 서비스도 있지만 여성·장애인·아동·청소년·이주민 등의 인권 증진과 사회적 기업에 대한 법률지원 등 공익 관련 활동도 주요 업무다. 사회정의 실현을 본질로 하는 변호사업의 특성상, 사회적 가치는 부수적인 업무가 아니라 경제적 가치와 동일선상에서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 결과 지평은 국내 로펌의 공익 활동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기업이 됐다.

지난 2016년 1월 무장애 통합놀이터인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내 꿈틀꿈틀 놀이터에서 어린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 지평은 장애단체, 아동단체, 법률가단체로 구성된 추진단과 연대해 모든 아동이 놀이터 접근과 시설 이용에 차별받지 않고 함께 놀 수 있는 통합놀이터를 만들기 위한 법 개정 운동에 참여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2016.1.13/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착한 로펌'이라는 인식은 사업적으로도 더 많은 기회를 가져왔다. 우선 훌륭한 변호사들이 지평에 모였다. 대표적인 지식 집약형 산업인 법률 서비스는 해당 변호사의 질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인 만큼, 소속 구성원이 누군지에 따라 로펌의 경쟁력도 달라진다. 그런데 김앤장 같은 대형 로펌에 충분히 가고도 남을 인재들이 '하이어드 건이 아닌 보람있는 일을 하는 변호사로 살고 싶다'며 매출액 기준 업계 10위 수준인 지평으로 오는 것이다. 이런 인재들이 모여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면서 성장동력이 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3년 임미경 변호사(현 서울동부지법 판사)는 서울대 로스쿨(2기)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첫 직장으로 지평을 선택했다. 1991년 대입 학력고사 인문계 전국 수석인 김지홍 변호사와 2007년 사법연수원을 4등으로 수료한 여연심 변호사(현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판사를 선택하는 대신, 당시 변호사 업계에서 '벤처기업'에 불과했던 지평에 입사했다. 각 로스쿨 수석 졸업생들의 입사도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평에서 실무 수습을 받은 한 로스쿨생은 "구성원의 공익 활동을 소극적으로 용인하는 걸 넘어, 많은 시간을 쓰는 걸 영예로운 것으로 생각해 장려하는 문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신뢰는 로펌의 비즈니스에도 기여했다. 변호사의 소송 관련 사무 업무는 일반 기업의 영리사업과 달리 높은 윤리적 신뢰도를 요구하는데, 때문에 고객들이 로펌을 선정할 때는 해당 로펌이 어떤 평판을 가졌는지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임성택 지평 대표변호사는 "그런 평판이 로펌에 대한 신뢰로 이어져 고객 확보에 더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평이 설립한 사단법인 두루 소속 강정은 변호사가 자신이 법률 상담 등을 지원하는 교도소 등 수용자 자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유튜브 채널 '씨리얼' 캡처). ⓒ 뉴스1

이와 관련한 지평의 대표적인 사업이 지난 9월 출범한 'ESG 센터'다. 기업을 대상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전략 자문 및 컨설팅 등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체계적인 플랜이 없는 기업에 전문적인 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해외에선 디엘에이 파이퍼(DLA piper)와 링크레이터스(Linklaters), 앨런 앤 오버리(Allen & Overy), 노튼 로즈 풀브라이트(Norton Rose Fulbright) 등 글로벌 대형로펌들도 비슷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출범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아 아직 구체적인 매출액 산정은 어렵지만, 조언을 요청하는 기업들의 수요는 이어지고 있다. 이미 국내 한 에너지사에 대한 탄소배출권 관련 자문과 대기업의 사회성과인센티브 관련 법률 자문, 기업지배구조 개선 관련 법률 자문 등 ESG 관련 의뢰를 받아 실적을 올렸다. 임 대표는 "(기업들이) 처음에는 주저하다가도 전문적인 자문에 대부분 크게 만족했다"며 "그게 기업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그 결과 ESG가 수익에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면 이런 사업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변호사의 존재 목적에 충실하다 보니 공익활동을 강화하게 됐고, 그 영역에서 사업을 찾다 보니 국내 로펌 업계에 'ESG 기업 자문'이라는 기존에 없던 시장을 찾게 된 것이다. 남들처럼 많은 수임료만 보는 게 아니라 '착한 일'에 집중했더니 경쟁사와 차별화된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린 지평의 사례는 법조 영역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SG센터 사업으로 더 많은 기업이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 이를 강화한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편익도 증가한다. 비영리 공익활동이 아니라 로펌의 비즈니스도 사회를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 대표는 "저희에게 일이 몰린다는 건 그만큼 기업들도 ESG를 모르고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세상이 됐다는 걸 절감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런 인식이 기업 일반으로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1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에서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가 뉴스1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0.11.12/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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