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의 병' 앓는 삼성…"고민보다 행동 필요"[이재용 회장 2년]
경영 공백으로 삼성전자 부동조직 돼…컨트롤타워 구성 목소리 커져
이재용 전면에 나서 조직 재정비해야…대형 M&A서도 역할 필요
- 한재준 기자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대적(對敵)이 무엇인가. 방심이다. 방심에서 오는 병은 잘 안 고쳐진다. 왜냐하면 제일 앞서왔고, 고칠 때 지도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삼성이 세계 1등하고 있는 사업부는 다 해당하는 얘기다."(2003년 10월 9일 메모리 사업현장 보고를 받은이건희 선대회장)
(서울=뉴스1) 한재준 기자 = 이건희 선대회장이 경계했던 '방심의 병'이 삼성전자(005930)가 위기를 맞고 있다. 30년 넘게 1위를 지켜 온 메모리 반도체가 경쟁사에 밀리고 있다. 스마트폰 사업도 애플과 중국의 공세에 위태롭다.
반도체와 세트 사업의 동반 부진은 불과 몇년 사이 찾아왔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미전실)이 해체되고 국정농단 사태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지속되는 동안 각 사업 부문이 외부의 새로운 자극 없이 현실에 안주해 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인 반도체 부문이 2019년 고대역폭메모리(HBM) 전담팀을 해체하는 실기를 범한 것도 이 기간에 이뤄졌다.
적극적인 투자를 통한 미래 신성장 동력 확보, 인재 육성, 글로벌 리더십 강화, 유연한 조직 문화를 골자로 하는 이 회장의 '뉴삼성'은 선언적 의미에 머물러 있다.
삼성전자에 위기의식이 없던 건 아니다. 이 회장도 취임 이후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내왔다.
이 회장은 올해도 여러 사업장을 방문, 경영진에게 "현재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더 과감하게 도전하자", "단기 실적에 일희일비하지 말자. 상황이 어렵더라도 담대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문제는 이 회장의 뉴삼성과 경영 메시지가 실제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법리스크가 지속되는 동안 기술경영에 구멍이 나면서 인력 유출과 경쟁력 저하가 발생했고, 사업 부문간 소통이 단절되면서 조직 문화가 경직됐다.
일례로 조 단위 적자가 지속되는 삼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의 가장 큰 문제로 조직 간 불통과 부서 이기주의가 꼽히고 있다.
결국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 회장이 키를 잡을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삼성의 준법경영을 감시하는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장마저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책임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옳다"며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를 촉구한 이유다.
경제계에서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통한 '움직이는 삼성'을 만드는 작업이 이 회장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보고 있다. 조직의 미래 전략을 수립하는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중장기 로드맵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각 사업 부문의 체계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지만 기술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우선 조직 체계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라며 "미전실을 대체할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재건해야 한다. 최소한 조직 내 위원회라도 만들어 전략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신사업 육성도 이 회장의 중요 과제 중 하나다.
이 회장은 인공지능(AI)과 바이오, 전장, 로봇 등 분야를 미래 먹거리로 정하고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신사업을 위한 대형 인수합병(M&A)은 없었다. 삼성전자의 대형 M&A는 2017년 전장·오디오 기업 하만 인수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꾸준히 M&A를 위한 탐색을 지속해왔다. 지난해는 미래사업기획단을 신설하고 각국 기업을 연구하고 있다. 한종희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부회장)이 올해 주주총회에서 직접 "M&A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진척됐다. 조만간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노키아 네트워크 사업부와 독일 콘티넨털의 전장 사업 부문 인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결단이다. M&A 과정에서 난관이 있더라도 확실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지만 지금의 삼성에는 결단력이 없다는 게 업계 지적이다.
한 부회장은 지난 9월 독일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M&A는 필수적이고, 지속해서 큰 것을 계획하고 있다. 신사업 태스크포스(TF)도 운영하면서 변신할 기회를 찾고 있다"면서도 "큰 빅딜은 여러 변수가 있고,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쉽게 의사결정을 못 하는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신사업의 구체화와 이를 위한 M&A 과정에서도 이 회장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여러 사업 분야의 접목과 새로운 기술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이 삼성전자 내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며 "삼성은 반도체와 세트, 바이오 등 여러 사업을 모두 영위하는 거의 유일한 글로벌 기업이다. 이 회장이 직접 인적 구성을 통해 새로운 경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hanantwa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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