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제로' 재계, 최악의 시나리오 비상경영…"내년이 더 어둡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 '3高' 비상에 칩4·IRA 법안까지 '설상가상'
삼성 2년만에 사장단 회의…LG·SK·현대차도 대책회의 잇따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엔지니어링 도스보카스 정유공장 건설 현장을 찾아 직원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2022.9.12/뉴스1

(서울=뉴스1) 신건웅 권혜정 기자 = 글로벌 경기침체 등의 여파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계제로'의 경영환경이 전개되면서 재계의 움직임이 긴박해졌다. 삼성, SK, LG, 현대차 등 4그룹 모두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열고 비상경영을 통한 위기 돌파 방안 모색에 나섰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현금 비중을 늘리는 등 긴축경영의 고삐를 한층 더 죄고 있다.

1400원을 넘어선 달러·원 환율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치솟는 금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물가 급등 등으로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가 현실화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반도체지원법과 칩4동맹,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이 불확실성을 키웠다. 특히 글로벌 수요 위축이 가팔라지면서 내년 상반기 글로벌 경기가 더욱 침체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6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지난달 26일 전자를 비롯해 SDI·전기·SDS·디스플레이 등 전자 계열사 사장단과 생명·증권·카드 등 금융 계열사 사장단 40여명이 모여 사장단 회의를 가졌다.

그동안 전자 계열사 사장단 회의는 가끔 열렸지만 금융 계열사 사장들까지 총출동한 것은 2020년 6월 이후 약 2년 만이다. 이재용 부회장도 오찬 자리에 참석해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사장단 회의는 내부 결속은 물론 위기 대응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룹 주축인 삼성전자만 하더라도 성장을 주도했던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고, 경기 침체 우려로 가전 재고가 쌓이고 있다.

경영에 복귀한 이 부회장은 급박한 상황을 고려해 국내는 물론 해외 사업장까지 찾아 현장경영에 나섰다. 추석 연휴 기간이던 지난달 8일에는 멕시코 하만 공장을 찾아 임직원들에게 "지금은 비록 어려운 상황이지만 과감한 도전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미래를 개척하자"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SK 워싱턴 지사에서 열린 SK 나이트 행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SK그룹 제공) 2022.9.22/뉴스1

SK는 오는 19일부터 21일까지 CEO 세미나를 열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성과 관리 및 기업 경쟁력 제고 방안 등을 논의한다. 최태원 SK 회장을 비롯해 수펙스추구협의회와 주요 관계사 CEO 등 30여 명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올해는 경영 환경 점검은 물론 미-중 갈등과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 발표도 진행할 계획이다.

최 회장은 21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진행한 'SK Night(SK의 밤)' 행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중국의 대만 공격에 따른 미-중 충돌 가능성 등 극단적인 위기 상황을 염두에 둔 컨틴전시 플랜을 검토하고 있다"며 "어떤 시나리오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생존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지금 현재로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구광모 (주)LG 대표가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LG 사장단 워크샵'에서 최고경영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LG 제공) 2022.9.30/뉴스1

LG는 구광모 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이 지난달 29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 사장단 워크숍을 열고 경영 전략을 논의했다. 구 대표와 사장단이 오프라인에서 한자리에 모인 건 2019년 12월 사장단협의회 이후 약 3년 만이다.

이날 구 대표는 "경영 환경이 어려울 때일수록 그 환경에 이끌려 가서는 안 된다"며 "주도적이고 능동적 자세로 다가올 미래 모습은 우리 스스로 결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동안 선택과 집중을 통해 구축한 사업기반을 토대로 5년, 10년 후의 미래 포트폴리오 방향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실행 전략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했다.

이달과 다음 달에는 한 해 동안의 사업 성과와 내년도 사업 계획을 논의하는 사업보고회를 열 계획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 숙소인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면담 관련 연설을 위해 함께 이동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2022.5.22/뉴스1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 글로벌 권역본부장 회의를 열었던 현대차그룹은 지난 8월 미국 IRA 시행 이후 최근 수시로 대책회의를 개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가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한해서만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IRA 법안을 유예·수정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IRA 발효로 한국산 미국 수출 전기차가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 혜택에서 제외된 상태다. 지난달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판매량이 전월대비 13% 감소하는 등 우려했던 IRA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IRA 발효 직후인 8월에 이어 지난달 말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출장길에 나서 현지 판매 영향을 점검하는 한편 오는 2024년 현대차 전기차 전용 공장이 들어서는 조지아 주정부 관계자들과 대책 마련을 논의했다.

포스코그룹은 이달 말 정례 사장단 회의를 열고 포항제철소 수해 복구 문제와 경영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포스코그룹은 전사 통합 위기대응팀도 운영 중이다.

한화그룹은 석유화학과 에너지 부문 계열사를 중심으로 일찌감치 비상경영에 돌입했으며 현대중공업그룹 건설기계 3사도 CEO 공동담화문을 통해 지난달 비상 경영을 선포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내년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이 현금 비중을 늘리는 등 비상 경영에 나서고 있다"며 "경영진의 내년 경영 계획에 대한 고심이 깊을 것"이라고 말했다.

ke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