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하면 또"…주가 조작으로 얼룩진 국내 증시[무너진 자본시장]①

라덕연 사태에 투자카페發 시세조종, 영풍제지까지…15개 종목 연루
주가 90% 내리고 분쟁 휘말려…"솜방망이 처벌 강화해야"

ⓒ News1 양혜림 디자이너

(서울=뉴스1) 박승희 기자 = 올 한 해 한국 증시는 주가조작으로 얼룩졌다. 지난 4월 이른바 '라덕연 사태'로 불리는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폭락 사건이 터졌고, 2개월이 채 안 돼 한 투자카페에서 시작된 무더기 하한가 사태가 이어졌다. 하반기에는 영풍제지 관련 종목이 급락했다. 작전세력의 타깃이 된 종목들은 반의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주가가 폭락했다.

지난 4월24일, 증시 개장 후 3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계 증권사인 SG증권을 통해 대량의 매도 물량이 쏟아졌다. 대성홀딩스·선광·세방·삼천리·서울가스·다우데이타·하림지주·다올투자증권 등 8개 종목은 하한가를 기록했고, 나흘 만에 시가총액 8조원이 사라졌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라덕연 호안투자컨설팅 대표가 지목됐다. 라덕연 일당은 당국이 단기 차익을 노린 작전 세력 감시에 치중한다는 허점을 노렸다. 라 대표는 연예인, 의사, 골프선수 같은 고소득 투자자들의 명의로 차액결제거래(CFD) 계정을 튼 뒤 2019년부터 약 4년간 서서히 주가를 띄웠다.

라 대표는 매수자와 매도자가 사전에 가격을 정하고 특정 시간에 주식을 매매하는 통정거래 기법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수법을 사용했다.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관심이 낮은 종목들 위주로 장기간 주가를 조작했다. 그는 짜고치기로 주가를 띄워 약 7305억원의 부당수익을 올린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지난 6월14일. SG증권발 하한가 사태 발생 2개월여 만에 유사한 사건이 터졌다. 동일산업·대한방직·만호제강·방림·동일금속 등 5개 종목이 일제히 하한가를 기록한 것이다. 주식투자 카페 '바른투자연구소'에서 꾸준히 추천 종목으로 거론됐던 사실이 드러났고, 카페 운영자와 회원들은 주식 시세조종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은 CFD를 이용하지 않았을 뿐 라덕연 사태와 여러모로 유사했다. 이들 일당은 최대주주 지분율이 높고 유통 주식 수가 적어 낮은 투자금으로도 주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종목들을 골라 약 3년간 통정매매했다. 카페 운영자와 회원들은 이를 통해 361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얻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10월18일엔 영풍제지와 그 최대주주인 대양금속이 나란히 하한가를 기록했다. 영풍제지는 지난해 6월 대양금속에 인수된 직후부터 오름세를 타기 시작해 올해만 최대 730% 상승한 종목이다. 외국인 창구에서 반의반도 추정되는 매수세가 꾸준히 유입되며 주가가 계단식으로 올랐다. 수사 결과 주가조작 세력이 3만8000회 넘는 시세조종 끝에 2789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

주가조작에 휘말렸던 상장사 대부분이 사건 발생 직전과 비교해 주가가 70% 이상 폭락했다. 사건 발생 이후 수개월간 대부분 종목이 주가를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다.

라덕연 일당의 주가조작 사태에 연루됐던 대성홀딩스는 4월21일 종가가 13만100원이었지만 약 8개월이 지난 지금 1만원(26일 기준)까지 92.31% 떨어졌다. 선광(-89.18%), 삼천리(-81.06%) 등도 대폭 하락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6월 주가조작 사태에 연루됐던 대한방직(-85.40%), 동일산업(-78.34%) 등도 낙폭이 컸다. 영풍제지도 94.07% 떨어졌다.

주가 조작에 연루된 뒤 상장폐기 위기에 직면하거나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본격화된 기업도 있다. 지난 6월 주가조작 사태에서 표적이 된 만호제강은 지난해 사업연도 감사보고서 감사의견이 거절되면서 매매거래가 중단되고 상장폐지 절차가 진행 중이다. 다올투자증권은 주가 폭락 직후 김기수 프레스토투자자문 대표가 지분을 대거 사들이며 경영권 분쟁이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솜방망이 처벌이 주가조작을 부추기고 있다며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이달 발간한 이슈 보고서에서 미국, 영국 등 해외 주요국들은 불공정거래 행위자의 실명이 포함된 불공정거래 행위 제재 내용을 공개해 투자자들을 보호하고 있다"며 거래제한 등 조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seungh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