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이 65살 때 건물을"…은행에 남긴 '유언'[파워실버의 大상속]①
유언장이 '분쟁의 씨앗'?…유언장 대신 '은행' 찾는 고령층
부자 10명 중 4명은 '60대 이상'…은행권 '파워실버' 유치 경쟁
- 김근욱 기자
(서울=뉴스1) 김근욱 기자 = # '빌딩 부자' 60대 A 씨는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며 건물 한 채를 아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문제는 아들이 '돌아온 탕아'라는 점이다. 가정불화로 집을 떠난 후 10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다. 당장 건물을 넘겨줄 경우 아들이 팔아서 써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A 씨는 "아들이 65세가 될 때 건물을 넘긴다"는 조건으로 은행과 신탁 계약을 맺었다.
# 수도권에 거주하는 90대 자산가 B 씨는 최근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줬다. 다만 고가의 아파트 한 채는 남겨뒀다. 10년 넘게 요양과 집안일을 맡아온 '그 사람'을 위해서다. 배우자와의 사별 후 법적 혼인 신고 없이 함께 거주한 사이였다고 한다. B 씨는 자녀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홀로 은행을 찾아 "사망 후 아파트를 그 사람에게 넘긴다"는 취지의 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아침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에피소드지만 모두 최근 은행에 접수된 '유언대용신탁' 사례들이다. 노년기에 접어든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재산을 안전하게 이전하기 위해 은행을 찾는 사례가 늘고 있다.
◇ '분쟁의 씨앗' 유언장의 한계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재산을 분배하는 수단으로 흔히 '유언장'을 생각한다. 유언은 대한민국 민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며, 이를 문자로 남긴 유언장이 재산을 효율적으로 나눠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언장은 한계점이 명확하다. 유언장의 또 다른 이름은 '분쟁의 씨앗'이다. 유언장이 미리 공개될 경우 상속인 간의 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장롱 속에 꼭꼭 숨겨놓는 경우가 많다. 결국 유언장의 존재를 알리지 못한 채 사망해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작성법도 엄격하다. 자필로 쓴 유언장에 날짜·주소·성명·날인 중 하나라도 없으면 무효다. 지난 2005년 배 모 씨(여)는 '모든 재산을 아들 윤 모 씨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사망했다. 문제는 배 씨가 유언장에 명확한 주소를 쓰지 않고 '암사동에서'라고 썼다는 것이다. 이어진 자녀들의 소송에서 2심 법원은 유언장의 효력을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법적 요건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 유언장 대신 '은행'으로
유언장을 대체하는 상품이 바로 '유언대용신탁'이다.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이 은행에 재산을 맡기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산을 관리하다 사후에는 배우자, 자녀, 제3자 등을 수익자로 지정해 재산이 이전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녀가 계승한 자산을 손자녀가 계승하는 '수익자연속신탁'도 가능하다.
자산을 위탁하는 계약이므로 별도의 유언장이 필요하지 않고, 사망 시 상속자가 빠르게 재산을 물려받아 장례비용에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신탁수수료는 개별 계약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계약보수는 신탁재산가액의 0.5%~1% △집행보수는 신탁재산가액의 0.75%~1.5% △관리보수(연보수)는 신탁원본평균잔액의 연 0.3%~연 1% 수준이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선 유언대용신탁이 '유언장 대용 금융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일본 내 유언대용신탁 수탁 건수는 지난 2023년 9월 기준 21만 2000건으로, 지난 2013년 6만 4000건 대비 3.3배 급성장했다.
◇ 부자 10명 중 4명은 '60대 이상'
은행권 타깃 고객층도 MZ세대에서 '실버세대'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대한민국의 부(富)가 이들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만 60대 이상 실버세대는 한국이 압축 성장을 하던 1970년 경제활동의 최전선에서 부를 축적한 이후 부동산·주식시장의 장기간 호황으로 재산을 불렸다. 그 결과 국내 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쥔 이른바 '파워 실버'가 됐다.
KB금융연구소의 '2023 한국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원이 넘는 자수성가형 부자는 60대 이상이 40.8%로 가장 많았다. 50대가 36.7%, 40대가 18.9%, 30대가 3.6%로 뒤를 이었다.
'파워실버'의 자산이동이 본격화되면서 은행권도 새로운 경영환경에 직면했다. 박지홍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도 부의 세대 간 이동이 지금보다 확대될 수 있다"며 "금융회사 입장에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할 경우 자산 유출 및 고객 이탈 발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ukgeu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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