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 불모지' 일본, 어떻게 '웹3 강국'이 됐나[인터뷰]

이원준 하이퍼리즘 대표 인터뷰
하이퍼리즘, 설립부터 일본·한국 '투트랙' 사업…일본서 VC 사업 확장 시동

이원준 하이퍼리즘 대표.

(서울=뉴스1) 박현영 기자 = 일본은 아시아 시장의 '코인 불모지'로 불리던 국가였다. 2014년 세계 최대 비트코인 거래소이자 일본 거래소였던 마운트곡스가 해킹으로 파산한 이후 일본 정부는 줄곧 가상자산에 강경한 자세를 취해왔다. 금융당국이 인정한 코인만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일명 '화이트리스트' 제도를 실시하면서 해외 가상자산 기업들이 진출하기 어려운 국가로 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확연히 달라졌다. 은행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고, 블록체인 기반의 '웹3 산업'을 위한 정책들을 마련하기 시작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웹3를 밀어주는 모양새다. 해외 가상자산·블록체인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가상자산 운용사 하이퍼리즘은 일본이 '코인 불모지'였던 2018년부터 일본과 한국 두 국가에 법인을 세워 '투트랙'으로 사업을 운영해왔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의 가상자산 규제 변화를 직접 체감해온 기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일본 규제 변화에 힘입어 일본에서 벤처캐피탈(VC) 사업 부문을 확장하고 있다. 그동안은 일본에 투자할만한 프로젝트가 없었지만, 최근 일본 내 웹3 산업 발전으로 투자 대상이 크게 늘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뉴스1>은 하이퍼리즘의 일본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이원준 하이퍼리즘 공동 대표를 만나 일본 웹3 산업의 분위기 변화에 대해 물었다. 일본 정부의 행보가 바뀐 이유는 무엇인지, 또 이 같은 변화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짚어봤다.

◇일본이 달라진 이유는? "기시다 정부 정책·웹3 패러다임 변화"

이 대표는 일본 내 패밀리오피스에서 근무하던 2018년 초 오상록 대표와 함께 하이퍼리즘을 설립했다. 가상자산 시장이 태동하던 당시 거래소는 있는데 기업들을 위한 회사는 왜 없는지 의문을 품게 됐고, 기업들을 위한 자산 운용 비즈니스를 시작해보자는 생각에 창업을 결심했다고 이 대표는 밝혔다.

사업의 기반은 이 대표가 있던 일본과 오 대표가 있던 한국이 됐다. 당시 일본은 2018년 1월 발생한 거래소 '코인체크' 해킹 사건으로 가상자산 업계가 많이 위축돼 있었다. 이에 일본에서만 사업을 하기 어려워 한국에서도 투트랙으로 사업을 펼치게 됐다.

다만 일본 시장은 고급 인력의 풀이 크다는 장점이 존재했다. 이 대표는 "한국 대비 일본의 장점은 고급 인력 풀이 훨씬 크다는 점이다. 일본 IB 업계에는 중국이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뿐 아니라 진짜 중국인, 진짜 미국인 인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일본 가상자산 시장은 위축돼 있었으나 고급 인력을 채용하기 위한 기반 자체는 일본이 탄탄했다는 설명이다. 현재 하이퍼리즘 일본 오피스에도 일본인, 한국인은 물론 태국인, 캐나다인 인력도 있다.

이렇게 일본과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하이퍼리즘은 기업들을 위한 가상자산 운용 비즈니스를 펼치며 규모를 확장해왔다. 흐름이 빠른 가상자산 시장에서 5년 넘게 버티며 일본의 규제 변화를 직접 체감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일본 시장이 가상자산 및 웹3에 긍정적으로 변화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짚었다. △기시다 정부의 해외 투자 유치 장려 △블록체인 업계 내 패러다임 변화 △대체불가능토큰(NFT)·메타버스 붐과 일본 콘텐츠 지식재산권(IP) 간 결합 가능성 등이다.

우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이끌고 있는 현 일본 정부는 해외 투자 유치를 장려하고 있다. 이 대표는 "IT 산업을 해외 투자 유치용으로 밀기엔 늦었고, 스타트업 분야에서 어떤 쪽을 밀어줘야 하는지 생각했을 때 웹3가 가장 적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기시다 총리는 지난 7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블록체인 콘퍼런스 '웹엑스 2023' 축사를 통해 정부 차원에서 웹3 산업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 대표는 블록체인 업계 내 패러다임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2018~19년 시장 초기에는 '웹3'란 용어가 유행하지 않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이 NFT, 메타버스 등에 적극 활용되면서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 자체가 '차세대 웹'인 웹3를 상징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이 대표는 "웹3라는 패러다임이 있기 전에는 일본에서 암호화폐(가상자산)를 가상통화라고 불렀다. 비트코인 백서가 'P2P(개인간 거래) 결제 시스템'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기 때문에 코인이 '통화'라고 생각한 것"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결제 수단이라기보다는 대체 자산으로 여긴다. 용어도 암호자산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용어 변경이 상징하는 건 패러다임의 변화다. 이 대표는 "업계 패러다임이 웹3로 넘어가다 보니 일본 시장에서도 블록체인 기술 활용이 인터넷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며 "더 이상 가상자산 및 블록체인이 '가상통화'라는 개념 자체에 머물러 있지 않고, 거대한 흐름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콘텐츠 강국'인 점도 변화의 이유가 됐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 수많은 IP가 있는 콘텐츠 강국이다. 때마침 웹3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NFT 및 메타버스 붐이 오면서 콘텐츠와 블록체인 기술 간 시너지가 커진 것이다. 이 대표는 "웹3로 시장 패러다임이 넘어가면서 일본 시장도 일본이 가진 콘텐츠, IP의 잠재력을 알게 됐다"며 "일본 IP와 웹3 산업이 결합하면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하이퍼리즘, 일본서 VC 사업 확장…국내 규제엔 '신중'

이 같은 일본의 변화에 맞춰 하이퍼리즘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기존 기업 대상 가상자산 운용 사업에 그치지 않고, 웹3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VC)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이 대표는 "일본을 기반으로 벤처캐피탈 사업 부문을 늘리고 있다"며 "일본 규제 환경이 좋아졌고, 일본 오피스에 글로벌 투자 심사 인력이 있어서 일본에서 벤처팀을 빌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사업 비중은 기존 가상자산 운용(트레이딩) 사업이 70%, 벤처캐피탈 투자 사업이 30% 정도다. 다만 VC 사업 비중을 더 늘리고 싶다고 이 대표는 밝혔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블록체인 VC로는 해시드가 있지만, 일본에는 대표적인 투자사가 없다. 일본 시장에서 대표적인 블록체인 투자사가 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VC 사업 비중은 하이퍼리즘이 준비 중인 2호 펀드를 기반으로 늘릴 예정이다. 현재 하이퍼리즘은 1호 펀드에 이어 2호 펀드를 준비하고 있다. 2호 펀드에서는 일본 주요 웹3 기업과 함께 공동으로 무한책임투자자(GP)를 맡을 계획이다. 또 일본 내 가상자산 투자 펀드라는 키워드를 부각해 투자자들을 끌어모을 예정이다. 목표 규모는 1억달러(약 1300억원)다.

이 대표는 앞선 1호 펀드에서 글로벌 딜과 일본 내 주요 딜에 모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일본 시장 내 인지도를 높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이 네트워크 같은 글로벌 유망 프로젝트의 투자에 일본에서 유일하게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어 "동시에 일본 주요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인 JPYC, 일본 블록체인 마케팅 에이전시인 퍼시픽메타 투자 등에 참여했다"며 글로벌 시장과 일본 시장 두 축을 모두 커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2호 펀드에선 △테크 △기업대기업(B2B) 사업 △인프라 등 세 가지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 투자에 나설 예정이다. 하이퍼리즘이 기업 대상 가상자산 운용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만큼, B2C 프로젝트는 하이퍼리즘과의 접점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이 대표는 "하이퍼리즘이 자신 있는 분야는 B2B"라며 "블록체인 기술이 '매스어답션(대중 수용)'을 일으키려면 '빌더(Builder)'를 위한 인프라 서비스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웹3 산업에 온보딩하지 않은 사람들이 온보딩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 온체인(블록체인 상) 데이터와 오프체인을 이을 수 있는 서비스들이 그 예"라고 설명했다.

VC 사업 비중을 늘리는 한편, 기존 가상자산 운용업은 국내 규제 상황을 살피며 신중히 이어갈 예정이다. 최근 국내 금융당국은 내년 7월 시행 예정인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 내 조항을 근거로 고객이 맡긴 가상자산을 외부로 이동시키는 가상자산 예치업이나 운용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이퍼리즘이 국내에서 가상자산 운용업을 지속하려면 고객이 맡긴 자산을 외부로 보내지 않고, 자체 알고리즘으로만 트레이딩(거래)해야 한다. 이 대표는 국내에선 이 같은 방식으로 운용업을 이어가고, 일본을 비롯한 해외 거점에 방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글로벌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 대표는 "2017년 중국에서 가상자산 거래소를 금지하면서 중국계 거래소가 다 해외로 나갔고, 결과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글로벌 거래소로 자리잡았다"며 "규제를 바꿀 수 없다면 글로벌 시장을 기반으로 사업해서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hyun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