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씰과 은행들의 '자발적 기부'[기자의눈]

은행들엔 민생금융 요구…정작 서민금융 예산은 삭감

29일 오전 경기 수원시 팔달구 대한결핵협회 경기도지부에서 관계자들이 크리스마스 씰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 News12024.10.29/뉴스1 ⓒ News1 김영운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초등학생 시절, 연말이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씰'이 등장했습니다. '좋은 곳에 기부한다'는 설명은 그럴싸했지만, 반마다 할당된 수량을 사지 않으면 눈총을 받는 분위기 속에서 기부보다는 강매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도 매년 씰을 사야 했고, 집 안에는 쓰지도 않는 씰이 점점 쌓여갔죠. 그래서 제 생애 첫 기부는 '강제 갹출'이라는 다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자가 되어 은행권을 담당하면서, 어린 시절 교실에서 보았던 그 씁쓸한 장면과 비슷한 상황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좋게 말할 때 자발적으로 해라'는 선생님들의 은근한 압박은 오늘날 정부와 금융당국의 모습과 꽤 닮아 있습니다.

지난해 말, 정부와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민생금융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은행들은 2조 원이 넘는 서민·취약계층 부담 완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민생금융 성과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자발적 참여'라는 명분이지만, 정부와 금융당국이 감독권이라는 회초리를 손에 쥐고 있는데 이를 거부할 은행이 있었을까요?

올해도 정부와 금융당국은 은행들과 TF를 꾸려 소상공인 지원 방안을 논의 중입니다. 물론, 이번에도 자발적 참여라는 이름으로요. 내년에도 수조 원대의 억지 기부 행렬이 이어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물론 경제도 어렵고, 취약계층의 삶이 힘든 건 사실입니다. 최근 한 30대 싱글맘이 사채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서민들을 위한 금융지원 확대는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정말 의지가 있는지에는 의문이 듭니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죠. 내년도 예산안을 보면 정부의 우선순위가 어딘지 알 수 있습니다. 금융위원회는 서민정책금융 상품인 햇살론15 관련 예산을 최초 1450억 원을 책정했지만, 기획재정부와의 협의 끝에 900억 원으로 삭감됐습니다. 정부 예산안이 확정되면 내년도 햇살론15 공급액은 올해보다 4000억 원 줄어들 수 있습니다.

또 서민들에게 50만 원 이하의 급전을 빌려주는 '소액생계비대출' 사업을 위해 신청한 1000억 원의 예산도 전액 삭감됐습니다. 결국 부족한 예산은 은행권의 출연금과 기부금으로 충당될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국회는 은행들이 매년 부담해야 하는 서민금융 출연요율 하한선을 기존 0.03%에서 0.06%로 인상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은행들의 출연금 부담은 1000억 원 정도 늘어나게 됐습니다. 소액생계비대출 사업을 위한 추가 기부도 이어질 전망입니다. 이미 우리은행은 150억 원을 추가로 기부했습니다.

아마 올해도 은행들은 군말 없이 정부와 금융당국의 요구에 응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부가 과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보람 있는 일로 느껴질까요? 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저도 사실 크리스마스씰을 사면서 선생님들에게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선생님은 씰을 좀 사셨어요?"라고요.

potgu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