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 도심 속 피서지 '은행'…5년간 점포 1000개 사라졌다

도란도란 대화하며 '피서'…폐점 주변 주민은 "아쉬워"
규제에도 효율화 이유로 감축…취약계층에겐 '패닉'

지난 13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쿨링포그가 가동되고 있다.2024.6.13/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할머니 세 명이 소파에 앉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족, 반찬, 옷까지 한참 동안 주제를 바꿔가며 대화가 이어졌다. 이내 할머니들은 눈치를 살피며 조곤조곤 동네 사람 뒷담화도 꺼내 놓았다. 어르신들의 삶을 엿들을 수 있는 이곳은 어느 동네 다방도, 노인정 사랑방도 아닌 서울 종로구의 한 은행 지점이었다.

바퀴 달린 장바구니 손수레를 이끌고 또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은행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이들이 대기표를 뽑지도 않고 곧바로 은행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대로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원래 앉아 있던 다른 무리의 할머니들은 청원경찰에게 "잘 놀았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 은행 문을 나섰다.

서울의 낮 기온 33도.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이었던 지난 13일 오후 은행 지점은 시민들의 무더위 쉼터가 됐다. 시민들이 은행 업무와 관계없이 오가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몸을 식히고 자리를 떴다.

무더위를 잠시 피하고 싶은 시민들에게 은행은 과거부터 도심 속 무료 피서지였다. 시중 은행들은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지점 한쪽에 생수를 가져다 놓고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공식적인 무더위 쉼터를 운영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서울 동대문구의 한 시장에서 노점을 하는 윤순애 씨(78·여)는 지난해 가게 앞에 있던 은행이 문을 닫은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앞서 은행이 있을 때는 윤 씨는 오늘같이 더운 날이면 은행에 들어가 잠시 더위를 피하곤 했다. 하필이면 오늘 유일하게 더위를 식혀주던 탁상용 선풍기도 고장이 나 작동하지 않았다.

서울 동대문구의 폐점한 은행 점포. 2024.6.13/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윤 씨의 가게 앞 지점이 문을 닫은 것처럼 시중은행들은 적극적으로 점포(지점+출장소) 수를 줄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국내은행 점포 운영 현황에 따르면 2018년 6771개였던 전국의 은행 점포는 지난해 말 5754개로 줄었다. 5년 만에 1017개, 약 15%의 점포가 사라진 것이다.

은행들이 점포를 줄이는 것은 '경영효율화' 때문이다. 은행 업무 대부분이 디지털화되고 비대면 거래가 늘어나고 있으니 비싼 임대료와 인건비를 쓰면서 점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바일 뱅킹은 해본 적조차 없는 윤 씨에게 은행의 폐점은 더위를 피할 쉼터를 잃는 것을 넘어 삶 자체를 흔드는 혼돈이었다. 그는 은행이 없어졌을 때 공과금 납부부터 모든 것이 불편했다며 이제라도 다시 은행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금융당국은 윤 씨 같이 비대면 거래가 어려운 금융취약계층들이 입는 피해를 막기 위해 2021년부터 점포 폐쇄 전 사전영향평가를 받도록 했지만 점포 수 하락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올해 1분기 국내 4대 은행의 공시자료를 통해 점포 수를 변화를 종합한 결과 또다시 13개의 점포가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올해도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하나, 우리, 신한, 농협 등의 은행들이 전국 지점에서 무더위 쉼터 운영을 시작했다. 은행 지점 근처에 있다면 고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

potgu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