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물든 홍상수 '수유천'…기묘한 코미디 [시네마 프리뷰]
18일 개봉 영화 '수유천' 리뷰
- 장아름 기자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울=뉴스1) 장아름 기자 = 강사 전임(김민희 분)은 배우 겸 연출자인 외삼촌 시언(권해효 분)에게 촌극 연출을 부탁한다. 촌극의 본래 연출자인 준원이 학생 세명과 연애로 구설에 오르면서 공석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언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후 강릉에서 책방을 운영해 오던 인물로, 오랜만에 연락 온 전임의 부탁을 들어준다.
전임은 자신의 상사인 정교수(조윤희 분)와 시언이 만나는 자리를 만든다. 정교수는 오래 전부터 시언을 존경해 왔다고 한다. 세 사람의 만남은 술자리로 이어지고, 전임은 이 관계에서 점차 소외된다. 이후 시언은 정교수와 더욱 가까워지면서도 학생들과 촌극을 준비해 간다. 매일 밤 달은 뜨고, 점점 보름달로 커져간다.
18일 개봉하는 '수유천'은 홍상수 감독의 32번째 장편 영화로, 최근 제77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김민희에게 최우수 연기상을 안겨준 작품으로도 주목받은 바 있다. 김민희는 연인인 홍상수 감독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이후 15번째로 호흡을 맞췄으며, 이번 작품의 제작실장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 '도망친 여자' '당신 얼굴 앞에서' '소설가의 영화' '여행자의 필요' 등 홍상수 작품을 함께 해온 권해효가 김민희와 호흡을 맞췄다.
영화는 시언이 전임의 부탁으로 촌극을 맡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로 전개된다. 줄거리나 촬영 방식은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과 크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 사건은 생략되고 쌓이는 대화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대화는 적나라하면서도 낯부끄러운 리얼리즘으로 조소와 냉소를 자아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겉도는 듯한 대화는 기묘한 긴장감을 준다. 전임은 시언에게 "잤냐"며 돌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때로 분출되는 격앙되는 감정 또한 당황스러운 리듬이다. 가을 캠퍼스를 배경으로 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은은한 코미디의 매력도 있다.
영화 속 수유천은 전임이 작업의 패턴을 스케치하기 위해 찾는 곳이다. 본인의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제외하면 전임의 대부분의 모습은 고립과 소외를 암시하듯 관계의 경계선 바깥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시언과 정교수의 술자리, 시언과 학생들의 촌극 연습, 그리고 촌극 무대와 뒤풀이까지 전임 캐릭터는 구조적인 기능도 함께 한다. 촌극 뒤풀이 자리에서 주인공인 전임이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 참석해 있는 모습 또한 의미가 궁금해진다. 이같은 배치는 시언이 연출한 촌극에서도 한 출연자가 객석을 등진 채로 앉아 연기하는 모습과도 중첩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시언과 학생들의 촌극 무대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대화다. 시언은 학생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을 하고, 학생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사람임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는 등의 진지한 대답을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한다. 술을 마신 중년 남성이 분위기를 잡으며 진지한 주제로 운을 떼고, 분위기에 휩쓸려 돌연 눈물을 흘리는 젊은 네 여성들의 대비가 기이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이들과의 거리두기를 통한 감상을 의도한 듯, 관객들 역시도 이전까지의 전임의 시선을 곱씹게 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대개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짙다.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과 홍 감독을 연결하며 극 중 대화와 캐릭터의 의미를 생각한다. 시언은 자신과 학생들이 올린 촌극의 반응이 좋지 않자, 자신들만 만족스러우면 됐다고 서로 끈끈하게 위로한다. 전임은 시언이 혹여나 정교수와 불륜을 저지를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시언이 별거 끝에 이혼했다고 고백하자 금세 안도한다. 현실과 절묘하게 겹치는 영화 속 순간들이 의미심장하게도 보인다.
'수유천'은 아름답고 잔상이 짙게 남는다. 서정적으로 담은 가을 풍경의 여운도 따뜻하다.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 전임의 몸짓도 눈여겨보게 된다. 이번 작품은 그간 홍상수 감독의 작품보다 주제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인상이다. 홍상수 월드가 반복적인 언어와 특징으로 이뤄졌다지만, 디테일하게 차이를 달리하면서 이전 작품과는 또 다른 존재와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일정한 형태나 양식이 아닌, 홍상수만의 구조이기에 서사와 메시지를 더욱 설명하기가 어렵고 그의 영화를 규정하기 어려워졌다는 인상이다. 영화에서 흐르는 수유천은 쉽게 잡히지 않는 서사처럼 치환된다. 그럴수록 더욱 반추하게 되는 '수유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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