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두고 스크린도 보수냐 진보냐 '이념 전쟁' [N초점]
보수 측 관심 받은 '건국전쟁', 누적 관객 50만명 돌파
진보 측은 '길위에 김대중' 주목…손익분기점 넘겨
- 정유진 기자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꼭 봐야할 영화'들이 살아남는 시대다. 티켓 값이 상승하고 극장 영화를 대체할 콘텐츠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요즘, 관객들은 극장에 가서 볼 영화를 고르지 않는다. '꼭 봐야만 한다'고 인식된 작품들을 골라 티켓을 예매한 뒤 극장을 향한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최근 극장가에서는 관객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일부 '꼭 봐야할 영화'가 갈리는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현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을 다룬 작품들이 관객들의 정치적 색깔에 따라 다양한 평을 받고 있는 것.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스크린에서 조용하지만 열광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이념 전쟁'이다.
영화 '건국전쟁'(감독 김덕영)은 스크린 '이념 전쟁'의 불씨를 키운 작품이다. 저예산 독립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적 행적 등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건국전쟁'은 지난 1일 개봉한 뒤 조용히 1만 명 이하의 일일 관객을 동원해 오다 최근 보수층 정치인 및 연예인들의 관람 인증이 화제가 된 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올라 흥행 중이다. 지난 16일 하루 이 영화는 5만 176명(이하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기준)을 동원해 2위를 차지했다. 누적관객수는 53만 5595명으로, 이달 1일 개봉 이후 16일 만에 50만명을 넘겼다.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나경원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 보수 성향인 여권 인사들도 '건국전쟁' 관람을 인증했다. 단체 관람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당원 100여 명과 함께 '건국전쟁' 관람을 인증했으며,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종교계에서도 단체관람에 나서고 있다.
정치인이 아닌 유명인의 경우 '건국전쟁' 관람 인증으로 인해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가수 나얼이 대표적이다. 나얼은 지난 12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건국전쟁' 포스터와 성경책 사진을 함께 게재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는 성경 문구를 인용했다. 이후 누리꾼의 반응은 양분됐다. 그를 지지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라'는 취지의 댓글을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건국전쟁'에 대한 유명인들의 반응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극명하게 나뉜다. 나얼처럼 영화 관람을 인증한 가수 김흥국은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아 부끄럽다"고 밝혔다. 반면 유튜브 구독자 95만 5000명을 보유한 한국사 강사 황현필은 '건국전쟁' 리뷰 요청에 "내 역겨움은 누가 담당하느냐"며 "역사학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끝났다, 어중이떠중이 말고 역사 전공한 학자 중 이승만을 찬양하는 이가 누가 있느냐, 거짓 정보에 세뇌돼 그게 진실인 양 믿고 그걸 추종하면 김일성 일가를 추종하는 북한 사람들하고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건국전쟁' 전에는 '길위에 김대중'(감독 민환기)이 개봉해 화제가 됐다. 지난 1월 10일 개봉한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을 한국 근현대사의 배경 위에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김대중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영화는 16일까지 12만 360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저예산 영화임에도 손익분기점인 12만명을 넘겼고, 미국에서도 16일부터 정식 개봉했다. '길위에 김대중'은 진보 성향인 야권 정치인들의 구심점이 되는 작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난해 말 열린 '길위에 김대중'의 VIP 시사회에는 광주 시민사회부터 박지원 전 국정원장,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부겸 전 국무총리,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참석했다. 또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경남 양산 메가박스에서 열린 '길위에 김대중' 단체 상영회에 참석해 "김대중 대통령께서 살아계신다면 지금 현상황을 통탄하며 행동하는 양심이 돼달라고 신신당부하실 것 같다"고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건국전쟁'이 보수층 집결 영화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조금 앞선 시기 개봉한 '길위에 김대중'에게도 다시 한번 이목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야권 측에서 '건국전쟁' 관람을 인증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것처럼, '길위의 김대중'을 봤다고 밝히는 여권 인사들도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건국전쟁'과 '길위에 김대중'은 각각 보수와 진보 진영의 지지를 받는 입장에 서며 대립하는 구도를 성했다. 한국사 일타강사로 유명한 전한길은 '건국전쟁' 관람을 인증한 뒤 "노무현 이야기를 담은 '변호사' 영화도, 박정희를 담은 '남산의 부장들'도, 전두환을 다룬 '서울의 봄'도 봤다"라며 "곧 '길위의 김대중"도 볼 것"이란 글을 남겼다. 이처럼 '건국전쟁'을 '변호인'이나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길위의 김대중' 등의 반대 선상에 선 영화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 '이념 전쟁'이 일어난 현 극장가의 상황을 방증한다.
eujene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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