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상한 가루가 있어요"…생물테러와의 조용한 전쟁

[요즘 질병청 뭐함?] 생물테러대응 실험실네트워크(LRN)
생물테러병원체 탐지 체계 구축…신속 검사 키트도 개발

지난해 7월 인천 지역 곳곳에서 발견된 테러 의심 우편물(인천소방본부 제공)2023.7.21/뉴스1 ⓒ News1 박아론 기자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 지난해 7월, 대한민국이 '정체불명 소포'에 발칵 뒤집혔다. 주문도 하지 않은 소포가 집집마다 배달됐고, 소포를 받은 시민들은 "독극물이 들었다" "가스가 들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소포를 받은 시민 중 일부는 어지럼증과 호흡곤란을 겪고 치료를 받기도 했다. 전국에 들어온 신고만 3428건이었다.

당국이 확인한 결과 해당 소포는 중국에서 출발해 대만을 거쳐 국내에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검사를 진행한 국방과학연구소에 따르면 이 소포들엔 위험 물질이 들어 있지 않았다. 전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 정체불명의 소포 사건은 다행히도 단순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전국민이 정체불명의 소포 하나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생물테러 가능성 때문이다.

생물테러는 바이러스, 세균, 곰팡이, 독소 등을 사용해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키거나 대량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무서운 테러다.

실제로 2018년 미국 국방부인 펜타곤에는 독성물질인 리신이 담긴 것으로 의심되는 소포가 배달되기도 했다. 이 리신은 0.001g의 극소량으로도 인명 살상이 가능하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전역에선 탄저포자가 담긴 우편물로 22명이 감염되고 그중 5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상처 난 피부를 통해 감염되는 피부 탄저의 경우 항생제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호흡기 탄저는 치사율이 매우 높으며 발병 시 조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치명률은 97%에 이르러 테러에 악용될 수 있는 대표적인 생물테러병원체다.

지난 2019년 생물테러감염병인 탄저균 확진환자가 발생한 상황을 가정해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2019.5.27/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생물테러는 국가 안보 전략과도 큰 연관성이 있다. 생물테러가 나라의 존립을 흔드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나라도 생물테러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오래전부터 조용한 전쟁을 치러왔다. 정윤석 질병관리청 고위험병원체분석과장은 "탄저, 페스트, 보툴리눔독소증, 에볼라바이러스병 등과 같은 생물테러감염병은 높은 치명률과 집단 발생의 우려가 있어 생물테러 의심 상황이 발생하면 원인 병원체를 신속하게 감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확산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것이 '생물테러 대응 국내 실험실네트워크(LRN)'"라고 설명했다.

2002년에 구축돼 22년째 운영되고 있는 '생물테러 대응 국내 실험실네트워크'는 현재 질병청을 필두로 전국 시·도 보건환경연구원, 전국 보건소, 국방부 유관기관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 기관들은 관련 기관의 기능과 생물안전 시설 보유, 기술 수준에 따라 A, B, C 등급으로 나뉘어 연계돼 있다.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검역소, 보건소, 의료기관 검사실, 국방부 유관기관 등 A등급 기관들은 생물테러 의심 상황 발생시 현장검사를 실시해 의심되는 검체를 채취하고 이송 B등급 또는 C등급 실험실에 이송한다. 지난해 생물테러 의심 신고가 들어와 검체 검사를 진행한 건수만 234건에 달한다.

김자은 질병청 연구관은 "국내에서 생물테러 의심신고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곳이 인천공항인데 인천공항에서만 보통 일주일에 1건 정도의 신고가 들어온다"고 말했다.

김 연구관에 따르면 인천공항의 생물테러 의심 신고는 청소 담당 직원이 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여기 백색 가루가 있다"는 신고 전화다.

이 신고를 받으면 3명의 검역관이 출동한다. 현장에서 직접 검사를 진행하는 검역관은 가장 높은 단계인 레벨 A의 완전 밀폐형 보호복을 입는다. 현장 상황을 기록하는 검역관은 그보다 두 단계 낮은 레벨 C의 보호복을 착용한다. 인천공항 검역관은 "보호복이 장갑부터 모든 게 하나로 붙어 있는 일체형인 데다 두께도 상당한데 3.6kg 정도 되는 산소통을 메고 안전모도 착용해야 해 힘든 점이 많다"고 말했다.

현장에 도착한 검역관들은 질병청이 개발한 '생물테러 병원체 및 독소 다중 탐지키트 9플러스'를 이용해 의심 검체에 병원체 존재 유무를 확인한다. 채취한 분말 형태의 검체를 용액에 넣고 키트에 떨어트리면 15분 이내에 △탄저포자 △두창바이러스 △페스트균 △야토균 △보툴리눔균 독소 A/B형 △리신독소 △황색포도알균 장독소 B형(SEB) △유비저균 △브루셀라균 등 9종의 병원체 및 독소를 감별해낼 수 있다.

질병청이 개발해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생물테러 병원체 및 독소 다중 탐지키트 9플러스'. (질병청 제공)

신속 검사를 끝낸 후 검체는 B등급인 질병대응센터, 보건환경연구원,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 국군의무사령부 등에 옮겨져 병원체 확인 진단과 역학조사가 진행된다.

등급 C의 질병청은 해당 병원체를 최종 확인하고 새로운 진단검사법을 개발·보급할 수 있는 실험을 진행한다.

정윤석 과장은 "생물테러감염병은 발생 빈도가 극히 낮아 수요 예측이 어려워 민간기업에서 독자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면서 "고위험병원체 특성상 병원체 취급을 위한 별도의 특수실험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 주도의 지속적인 연구 개발이 반드시 필요한 분야"라고 말했다.

이에 질병청은 생물테러감염병 병원체 등 고위험병원체에 대한 진단검사 시약 및 키트, 백신, 치료제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진단검사 시약 및 키트 성능 검증에 표준물질로 사용할 수 있는 고위험병원체에 대한 유전 물질을 생산해 확보하고 있다.

정 과장은 "2004년 민간제조업체와 공동 개발한 '생물테러병원체 및 독소 다중탐지키트'의 지속적인 성능 개선 연구를 통해 검출 민감도를 2~5배 향상시켜 '생물테러병원체 및 독소 다중탐지키트 9플러스'를 만들었다"며 "2022년부터 전국 보건소 및 검역소 등 공공기관에 배포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테러 병원체와 독소를 즉시 탐지할 수 있는 현장검사 키트로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질병청은 이에 더해 유전자 검사 키트도 개발하고 있다. 신속함은 '생물테러병원체 및 독소 다중탐지키트 9플러스'와 동일하지만 실험실에서 하는 검사와 견줄 만큼 민감도와 정확도가 뛰어나다. 따라서 검역관이나 소방관, 경찰관 등이 바로 현장에서 검사해도 더 높은 확률로 생물테러 병원체와 독소를 가려낼 수 있게 된다.

질병청은 또 GC녹십자와 함께 세계 최초 '재조합 단백질 탄저백신'을 개발해 지난해 11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품목허가 신청을 하기도 했다.

허가를 받게 되면 전 세계에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탄저백신 개발에 성공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전문가들은 상용화와 범용성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미국에 이은 두 번째 탄저백신 개발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질병청 관계자는 "식약처 품목허가 취득이 완료되면 탄저백신 생산·비축을 통해 백신주권을 확립하고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백신의 국내 자급이 가능해져 수입 비용 절감과 안정적 백신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백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걸 막기 위해 백신을 맞겠다는 의미보다는 보유하고 있는 그 자체가 '우리나라는 생물 테러를 일으켜도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안보 전략이 된다"고 강조했다.

질병청은 국제 공조에도 힘쓰고 있다. 미국 질병예방센터(CDC)가 주관하는 국제실험실네트워크에 참여해 생물테러병원체 최신 탐지·검사법을 확보하고, CDC에 방문해 최신 검사법 훈련과 국내 제작 검사시약의 성능 평가 등을 진행하고 있다.

정윤석 과장은 "앞으로도 질병청은 실험실 네트워크를 확대 구축해 탐지‧검사 가능 생물테러감염병을 늘려나갈 것"이라며 "생물테러감염병 백신, 치료제 개발에 힘쓰면서 진단·검사법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sssunhu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