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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사고냐, 문법이 먼저냐'…아르헨 '젠더중립 표현' 금지 논란

로망스어 여성·남성형 명사 性 구분…스페인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권 등 고질적 쟁점
'중도 보수' 성향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정부, 세계 최초 '性중립 표현' 사용 금지 정책 채택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2022-07-21 14:01 송고 | 2022-07-21 16:54 최종수정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에밀리, 파리를 가다(Emily in Paris)' 中. © 뉴스1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에밀리, 파리를 가다(Emily in Paris)' 中. © 뉴스1

#.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에밀리, 파리를 가다'에는 미국인 마케터로 프랑스에 파견된 주인공 에밀리가 불어로 '질(Le vagin)'이 '여성형 명사'가 아닌 '남성형 명사'인 점에 당황해 반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지인 상사에게 왜 '질은 여성의 것인데 여성형 대명사(La)가 아닌 남성형 대명사(Le)를 붙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서 트위터에 '질은 남성형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올려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의 리트윗을 받는 설정이 전개된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등 로망스어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명사의 성별 구분이다. 스페인어로 책(el libro)은 남성형 명사고, 집(la casa)은 여성형 명사다. '친구'도 성별이 남자면 '아미고(el amigo)', 여자면 '아미가(la amiga)'다. 오랜 시간 그렇게 써오고 굳어졌다. '그것', '이것'을 뜻하는 지시대명사에도 성별이 있기 때문에, 각 명사의 성별 구분은 꽤 중요하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이 성별 구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우선 복수형 명사에서 '여성과 남성이 한데 모이면 남성형으로 통칭'하는 문법 규칙이 논란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로 '친구들'을 칭할 때 모두 여자라면 '아미가스(las amigas)', 모두 남자면 '아미고스(los amigos)'다. 그런데 여자가 다수라도 남자가 1명만 포함되면 그 친구들은 아미고스가 된다. 이 규칙은 모든 복수형에 적용된다.

이런 문법이 성 차별적이라는 각성으로 복수형 호칭시 각 성별을 모두 언급하는 게 '에티켓'이 된지 오래다. '여러분(señores)' 대신 '신사숙녀 여러분(señoras y señores)'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또 '라틴' 문화권의 성 인식이 점차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LGBTQ)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성별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나누는 이분법적 언어 사고는 '올바른 성 인식'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에 최근에는 아예 '중성형' 명사를 만드는 일종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남성형 규칙을 따라 amigos로 통칭하는 대신 amigxs나 amig@s라는 새로운 '성중립 표현법'이 청년층과 성 인식에 민감한 사람들 사이에서 두루 쓰이게 된 것이다.  

어린이날을 상징하는 소셜미디어(SNS) 게시물용 제작 사진에 어린이(niño, niña)와 친구들이란 단어를 성 중립적 표현 @을 사용한 모습이 보인다. © pinterest
어린이날을 상징하는 소셜미디어(SNS) 게시물용 제작 사진에 어린이(niño, niña)와 친구들이란 단어를 성 중립적 표현 @을 사용한 모습이 보인다. © pinterest

히스패닉 인구가 많은 미국에서는 2018년 널리 쓰이는 영-서 사전에 라틴계 사람을 통칭하는 단어 '라티노(Latino)'의 성중립 표현 'Latinx'를 등재했다. 내달 7일 취임 예정인 프란시아 마르케스 콜롬비아 부통령 당선인은 선거 유세 기간 성중립 표현을 사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로망스어권과 특히 중남미 많은 나라에서 성중립 표현은 점차 공적인 성격을 띄게 됐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포용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취지로 일선 교사들도 성중립 표현을 교육현장에 적극 활용해왔다.

그런데 남미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돌연 성중립 표현 사용을 금지, 논란이 전체 미주 대륙에서 과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언어 사용 능력 저하" vs. "성차별과의 싸움"

2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부에노스아이레스시(市)는 지난달 교사가 수업 시간과 학부모와의 의사소통에서 성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시 교육당국은 "성 중립적 표현이 문법 규칙을 위반해 학생의 독해력을 방해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세계 최초로 성중립 표현 사용을 구체적으로 금지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책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성애자 인권단체 등 5개 이상의 시민단체가 정책 취소를 요구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아르헨티나가 2010년 동성혼을 합법화하고, 2012년에는 세계 최초로 의사의 개입 없이도 공적 문서상 성별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키는 등 젠더 감수성이 높은 국가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정부는 공공부문 일자리의 1%를 트랜스젠더에게 할당토록 하는 법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퀴어 축제 참가자들이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무지개색으로 치장하고 있다. © AFP=News1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퀴어 축제 참가자들이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무지개색으로 치장하고 있다. © AFP=News1

이번 논란은 정치 공방으로도 확대될 조짐이다. 현재 아르헨티나 집권당은 좌파 성향의 '모두의 전선'인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라시오 로드리게스 시장은 중도우파 성향의 공화주의제안당(PRO) 소속이다.

하이메 페르치크 교육부 장관은 "이번 조치가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시기 '왼손 사용'을 금지한 정책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학생들이 성 중립적 표현을 쓰는 건 국가 전체에 만연한 성차별적 태도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작년 12월 우루과이 공교육청도 스페인어 규칙에 부합하지 않는 점을 이유로 '포괄적 언어(성 중립적 표현)' 사용을 제한하는 메모를 발행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정책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학교나 정부문서에서 성중립적 표현을 금지하자는 제안은 페루와 멕시코, 브라질의 일부 주(州)정부에서 추진되기도 했다.

미주 대륙만의 일도 아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교육부 장관이 부내 소통과 학교에서 포괄적 언어 사용 자제를 권고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저명한 프랑스어 사전이 성 중립적 단수대명사 'iei'를 추가해 사회적으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내달 7일 취임할 콜롬비아 첫 좌파 정부의 첫 흑인 여성 부통령 당선인 프란시아 마르케스(우측)는 선거 유세 기간 성 중립적 표현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왼쪽은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당선인.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내달 7일 취임할 콜롬비아 첫 좌파 정부의 첫 흑인 여성 부통령 당선인 프란시아 마르케스(우측)는 선거 유세 기간 성 중립적 표현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왼쪽은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당선인.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전문가들의 견해도, 정치권도, 여론도 엇갈리지만 적어도 성 중립적 표현이 독해력에 미치는 영향은 불분명하다고 아르헨티나 신경과학자(인지 연구) 플로렌시아 살바레사 박사의 발언을 NYT는 전했다.

물론 살바레사 박사 역시 'x'나 '@'를 표현할 음절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성 중립적 표현법은 말을 막 배우는 어린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아울러 이 같은 논란에도 학교 교육에서 성 중립적 표현 사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운동이 확대될 것으로 믿는다고 NYT는 덧붙였다.

커뮤니티센터 방과후 자원봉사자인 알레한드라 로드리게스는 "이미 사용 중인 것을 금지할 수는 없다"며 "언어는 늘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도 살아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에서 방을 세 놓는 인터넷 게시물에 성 중립적 표현 amig@s가 사용된 모습. 온라인상에서 성 중립적 표현 사용은 보편적이다. © 뉴스1
스페인에서 방을 세 놓는 인터넷 게시물에 성 중립적 표현 amig@s가 사용된 모습. 온라인상에서 성 중립적 표현 사용은 보편적이다. © 뉴스1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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