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최고 명필가 글씨 세상 밖으로…동농 김가진 서예전
유홍준 "파격의 힘, 전통의 힘"…"독립투사로 재평가 반드시 이뤄져야"
서거 102년 만에 첫 전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9월 19일까지
- 김일창 기자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글씨를 잘 쓰지 않는 시대, 100여년 전 당대 최고 명필가의 글씨가 세상에 나왔다. 때로는 반듯하고 때로는 자유분방하지만 그 무엇이든 글씨의 기저에는 단단함이 가득하다. 글씨는 사람의 인격이라 했던가. 혼란했던 시대에 국노(國老)로 칭송받던 동농(東農) 김가진의 인격을 엿볼 수 있는 서예전 '백운서경'(白雲書境)이 9월 1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다.
김가진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 전투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11대손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안동김씨 김응균의 아들로 1846년 태어났다. 41세인 1886년에 문과에 급제, 규장각 참서관으로 시작해 주로 외교관으로 일하다 참의내무부사 시절 고종의 명을 받아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법부대신과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김가진은 1907년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관직을 떠났지만, 1909년 대합협회의 회장이 되어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맞서 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다 1919년 세상에 다시 나와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에 취임하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됐다. 조선 왕조의 대신 중 유일하게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가 바로 김가진이다.
어릴 적부터 명석했던 김가진은 특히 글씨를 잘 썼다. 그는 자기 이력서에 "어린 나이에 서법을 배워 붓글씨에 깊이 빠졌고, 땅바닥이건 이불이건 글씨를 연마했다"고 적었다.
김가진의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건 '백운동천'(白雲洞天)이다.
김가진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백운동 골짜기에 백운장이라는 집을 짓고 스스로 백운동 주인이라고 한 일을 기린 이 글씨는 지금의 서울 자하문 터널 위쪽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에 암각으로 새겨져 있다.
한 글자당 크기가 가로 1.2m, 세로 1m 정도로, 전시장에서는 탁본 형태로 전시돼 있음에도 그 웅장함이 대단하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의 한자와 한글 편액도 김가진의 글씨로 추정된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라는 구절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이완용이 아닌 김가진의 필체가 확실하다는 의견이다.
김가진의 후손들은 과거 '독립문' 탁본을 소장했지만 현재 분실한 상태이다. 김가진의 증손녀인 김선현 오토 대표는 지난 23일 간담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어릴 적 집안에서 탁본을 본 기억이 분명하다"며 "계속해서 탁본을 찾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뿐만 아니다. 창덕궁 후원에 걸린 현판 대부분은 모두 김가진의 글씨이다. 이번 전시에는 창덕궁에 현전하지 않는 현판 글씨도 출품됐다.
김가진은 추사 김정희와 몽인 정학교, 위창 오세창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다.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추사와 신감각파적 분위기를 지닌 몽인, 정중하고 단아한 위창이라면 김가진은 정통파였다. 전시추진위원장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김가진의 글씨는 파격의 힘, 전통의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근대기 서단의 유행과 시시각각 변하는 취향을 따르지 않고 오랜 기간 고법의 정수를 체득하는 데 천착해 50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행서·초서를 쓰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정통을 고수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줬던 김가진의 이런 자세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표본으로 통한다.
전시는 김가진의 삶과 예술을 7개의 주제로 나눠 보여준다.
각각의 작품에서 당대 최고의 서예가 다운 면모를 드러내지만, 아들 김의한의 한글 교육을 위해 직접 쓴 한글 교재와 첫돌을 기념해 쓴 천자문에서는 그의 따뜻함과 정갈함이 엿보여 눈길을 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김가진이 일제의 남작 작위를 받을 때 (훗날 반납) 바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애국훈장을 받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환과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이 모두 애국훈장을 받은 것과 대조적이다.
신민규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은 "1910년 한일강제합병 후 일제는 예우차원에서 당시 대신들에게 모두 남작 작위를 수여했다"며 "바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가 올바르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김가진이었지만 상하이에 있는 그의 묫자리와 비석은 망가져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그 위를 지나다니는 실정"이라며 "100년 넘게 낯선 이국땅에 누워 고국산천을 꿈꾸고 있을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이번 전시를, 그의 사후 102년 만에 준비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유 전 청장은 "이번 전시는 독립운동가이자 애국계몽가로서 명성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김가진의 서예 세계를 재조명하는 자리"라며 "아울러 김가진이라는 근대의 위인을 세상에 널리 올바로 알리자는 뜻이 있다"고 강조했다. 무료관람.
ic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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