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일타 스캔들'과 마르셀 프루스트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저 여자 음식에만 반응을 했는지. 왜 난데없이 눈물이 났는지. 왜 그렇게 저 여자한테, 그 식구들한테 자꾸 마음이 갔는지."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tvN드라마 '일타 스캔들'. 일타 수학강사 최치열(정경호 분)과 '국가대표 반찬가게' 주인인 전 핸드볼 국가대표 남행선(전도연 분)이 주인공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타강사 최치열은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 입맛이 없으니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사는 재미가 없다. 그러다 우연히 비서가 사 온 도시락을 먹고는 입맛이 살아나 활력을 되찾는다. 그렇게 국가대표 반찬가게의 단골이 된다. 최치열은 궁금하기만 하다. 왜 국가대표 반찬가게에서 만드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한 기분이 드는지. 여기에 반찬가게 주인 딸이 자신에게 수학 강의를 듣게 되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끼어든다.
8화 '인연이 운명이 되는 귀납적 추론'에는 치열이 행선의 이모가 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곳은 치열이 가난한 대학생 시절 식권으로 밥을 사먹던 식당이었다. 모든 게 그대로인 그곳에서 치열은 자신의 이십 대를 회억한다. 행선의 손맛은 엄마한테 전수받은 것이다. 행선의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치열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행선 엄마를 추억한다. 그리고 행복감에 젖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승용차 안에서 치열은 위의 독백을 한다.
'일타 스캔들'이 시청자를 사로잡는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입시와 사교육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과 맛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맛이 '스캔들' 발생 요인이다.
채플린은 왜 9년만에 고향에 갔을까
런던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미국 순회공연을 떠난 게 1912년이다. 순회공연 도중 우연히 영화사 사장의 눈에 들어 무성영화에 출연한다. 두 번째 영화 촬영을 앞두고 채플린은 '떠돌이' 캐릭터를 창조해냈고,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뀐다. 무성영화의 대스타! 미국으로 간 지 2년만에 채플린은 배우 겸 감독으로 승승장구한다. 영국과 유럽에서까지 채플린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무성영화 사상 최대의 히트작 '키즈'가 개봉한 게 1921년. 그해 8월 채플린은 어느 작가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는다. 작가는 채플린을 위해 특별히 영국식 스테이크와 콩팥구이를 준비한다. 무심코 스테이크와 콩팥구이를 먹다가 채플린은 덜컥 목이 멘다. 고향 생각이 치밀어올라서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런던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채플린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런던을 방문하기로 한다. 9년 만의 금의환향(錦衣還鄕).
'프루스트 기억'(Proustian Memory)라는 용어가 있다. 음식을 먹다가 음식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떤 음식을 먹다가 불현듯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 프루스트 기억은 정신분석 용어로 '인볼룬터리 메모리'(Involuntary Memory)이다. 우리말로 '비자발적 기억' 혹은 '불수의(不隨意) 기억'이다. 사람의 경험은 후각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궁극(窮極)의 문학으로 평가된다. 바늘 끝 같은 예리한 감각으로 개인의 삶과 시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해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는 것에서 비롯된다. 김희영이 옮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을 펼쳐본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 기쁨이 홍차와 과자 맛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그 맛을 훨씬 넘어섰으므로 맛과는 같은 성질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디서 그것을 포착해야 할까? 두 번째 모금을 마셨다. 첫 번째 모금이 가져다준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본문 중)
프루스트는 '불수의 기억'을 소설에 등장시킨 최초의 사람이다. 프루스트는 '불수의 기억'을 과거의 진수(眞髓)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발전한 것이 자전적 기억이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마리골드 린턴(1936~)은 자전적 기억 연구의 선구자다.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일상적인 것들이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가 '피시 앤 칩스'를 먹고 싶었던 까닭
'라이언'이라는 영화가 있다. 1986년 인도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졸지에 길을 잃어 고아가 된 다섯 살 소년 사루. 우여곡절 끝에 호주로 입양된다. 사루는 훌륭한 양부모를 만나 대학을 마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도 출신 친구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거기서 우연히 '잘레비'라는 튀김 과자를 먹어 본다. 그 순간, 형과 고향에서 먹어보았던 잘레비 맛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친다. 이후 하루 종일 고향 생각뿐이다. 결국 회사도 그만두고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고향을 찾아가기로 한다. 기적적으로 고향을 찾아가 엄마와 형을 만난다. 이 모든 것은 어릴 적 뇌에 각인된 튀김 과자 잘레비에서 비롯되었다.
서울 삼청동에는 팥죽을 파는 유명한 집이 있다. '서울서 두 번째로 잘하는 집'이라는 옥호를 내건 집이다. 팥죽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집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나도 여러 번 가봤다. 몇 년 전 주인 김은숙씨 인터뷰가 신문에 나와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주인 김은숙씨의 어머니는 함경북도 청진 사람이다. 1·4후퇴 때 어머니는 헤어진 남편을 찾아 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 모녀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열두살 소녀 김은숙까지 거리로 나서야만 했다. 소녀는 좌판을 열고 담배를 팔며 푼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녀는 우연히 단팥죽을 먹어 보았다.
"뜨끈한 팥죽이 입안을 적시는데 귀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죠."
김씨는 그때의 느낌을 잊지 못해 1980년대 초 삼청동에 단팥죽 전문집을 차리게 되었다. 그렇게 40여년이 흘렀다. 오늘도 단골들은 단팥죽을 먹으며 '귀한 대접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
스위스 바젤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호주 식물학자 데이비드 구달(1914~2018)을 다시 기억해본다. 나는 이미 '세계인문여행'에서 구달 박사 이야기를 여러번 언급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치츠 케익'과 '피시 앤 칩스'를 맛보았다. 이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들었다. 그리고 주사액이 혈관 속으로 들어갔다.
온 곳으로 돌아가는 그 장엄한 순간, 무수한 시간이 한 점으로 소멸하는 순간, 우리는 음식과 음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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