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그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전업 작가 5년째인 나는 오전에는 무조건 집에서 글을 쓴다. 하루 24시간 중 가장 집중이 잘되는 시간대는 새벽 박명(薄明)이다. 그때쯤 글을 쓰기 시작해 평균 3~4시간 정도 글을 쓴다.
많은 작가가 비슷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별도의 집필실이 아닌 거실에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다. 거실 통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산의 기운이 몰입에 도움을 준다.
글을 쓰는 전용 의자도 따로 있다. 5년 전 이케아에서 사서 조립한 2만9000원짜리 안락의자다. 여기에 앉아 등받이에 기대면 몸이 뒤로 젖혀진다. 역시 이케아에서 구입한 노트북 전용 반원형 테이블을 올려놓는다. 다시 발 받침 보조 의자에 발을 얻는다. 이렇게 하면 무릎이 엉덩이보다 높아지면서 노트북과 몸이 둔각(鈍角) 상태가 된다. 반원형 테이블에 노트북을 놓으면 공간이 좁아 책이나 자료를 옆에 둘 수가 없다. 옆에 보조 탁자를 놓고 책이나 음료 잔을 놓는다.
사무용 책상에 앉아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면 몸과 노트북은 예각(銳角)이 되기 쉽다. 자신도 모르게 목을 빼게 되고 어깨가 움츠러든다. 내 경우 일반 테이블에서 글을 쓰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거북목이 된다. 어떤 때는 거북목으로 인해 목이 뻐근하고 손 저림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안락의자에 반쯤 누워서 머리를 젖히면 편한 자세가 나온다. 몸의 모든 근육이 눈곱만큼도 긴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생각은 새장을 벗어난 새들처럼 훨훨 자유로워진다.
연초에 나는 J.D. 매클라치의 '걸작의 공간'(마음산책)을 서가에서 꺼내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읽었다. 꼭 11년 전에 읽은 이 책의 원제는 '미국 작가들의 집'(American Writers at Home). 미국 작가 21명의 집과 집필실에 관한 책이다. 나의 천재 연구와 유사한 부분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편을 넘기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밑줄 친 세 줄을 발견했다.
"프로스트가 글을 쓰던 모리스풍 의자가 어느 다락방 구석에서 발견되어, 현재 응접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시인은 그 의자에서 무릎에 판자를 대고 글을 쓰곤 했으며, 일할 때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들을 닫아두었다."
프로스트가 나처럼 글을 썼구나! 나와 똑같은 집필 방식을 선호한 시인이 다른 사람이 아닌, '가지 않은 길'의 시인 프로스트였다니.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경우
미국 시나리오작가 겸 소설가 달튼 트럼보(1905~1976).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나 영화계 종사자가 아니라면 트럼보의 이름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매카시 광풍 속에서 실명을 숨긴 채 11개의 필명을 사용해 각색을 했던 시나리오 작가.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남긴 걸작들을 열거하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로마의 휴일' '스파르타쿠스' '엑소더스' '브레이브 원….
글쓰기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작업이다. 시든 소설이든 산문이든 장르에 관계없이. 생각은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실타래가 풀리듯 풀려나간다. 전두엽이 과열되면 글은 써지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심신이 이완된 상태는 언제인가. 잠잘 때, 산책할 때, 목욕할 때가 아닐까.(어떤 이는 술을 마실 때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샤워를 하면서 여러 번 번득이는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지만 그만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즉시 물기를 털고 몇 글자라도 메모를 했더라면 그 생각을 잡아 두었을 텐데.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한다면 피부가 보드라워지면서 생각지 못한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비눗방울처럼 뽀글뽀글 떠오른다. 욕조 옆에 수건과 노트를 둔다면 비눗방울이 터지기 전에 생각의 편린들을 포착할 수가 있다.
트럼보가 그런 경우다. 트럼보는 아예 초고를 욕조에서 목욕을 하며 쓰곤 했다. 폭이 넓은 나무판을 욕조에 걸쳐놓는다. 이 나무판은 밀거나 당길 수 있는 이동식이다. 트럼보는 욕조에 들어가 머리를 담그고 있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무판을 끌어당긴다.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턴 다음 이젤처럼 세워놓은 원고지에 글을 쓴다. 때로는 원고지 옆에 위스키 잔이 놓일 때도 있다. 이렇게 쓴 초고를 집필실에 들어가 타이핑해서 원고 형태로 만든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도 먼저 노트에 글을 썼다. 파리 시절 그는 되마고 같은 생제르망의 단골 카페를 찾아 공책을 펴놓고 몇 시간씩 끙끙거렸다. 그리고서 타이핑해 원고 형태로 만들었다. 무명일 때는 직접 타자기로 옮겼지만 이름을 얻고 나서부터는 아내들이 타이핑 작업을 도맡았다.
왜 노트나 원고지에 먼저 쓸까
소설가 김훈의 집필 습관은 제법 알려졌다. 그는 원고지에 연필로 쓴다. 공책에 먼저 글을 쓰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쓰는 행위는 매우 드물다. 작가의 특별한 개성을 엿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김훈이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원고지의 칸들이 사유의 흔적들로 채워진다. 흑연 심이 하얀 원고지에 줄을 맞춰 한칸 한칸을 검은 모를 심어나갈 때 그는 희열을 느꼈으리라.
나는 약속을 스마트폰에 저장하지 않고 수첩에 기록한다. 신문을 읽다가 얻는 중요한 정보도 수첩에 기록한다. 리서치한 자료들은 대부분 다이어리에 시간순으로 옮겨놓는다. 시대에 뒤처진 아날로그 방식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내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뭔가를 적을 때 손바닥에 닿는 그 촉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종이의 물성(物性)이 손바닥에 느껴지면 원목 탁자를 쓰다듬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왜 그럴까. 모든 종이는 나무에서 태어난다. 나무의 고향은 흙이다. 사람도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종이 위에서 스스슥거리며 흔적을 남기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문명비평가이자 작가인 제러미 리프킨. 그가 써낸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공감의 시대' '수소 혁명' 등은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정력적인 글쓰기를 진행 중이다.
그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오전 시간에만 글을 쓴다. 오후에는 쉬면서 리서치에 시간을 보낸다. 리프킨의 집필 습관은 조금은 특별해 보일 수도 있겠다. 디지털 시대의 최첨단을 걷는 그는 여전히 노트에 먼저 글을 쓴다. 그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하는 훈련(daily discipline)이다. 생각하는 속도와 손이 연결된 느낌이 좋아 노란색 노트에 먼저 쓰고 컴퓨터로 옮긴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더 열고, 더 성찰하며, 남과 더 연결되고, 더 깊이 생각하면 좋은 글이 나온다."
작가들의 집필 습관은 천차만별이다. 밀리언셀러 소설가 김진명은 불규칙적으로 글을 쓴다. 이른바 '필'이 왔을 때 집중적으로 쓴다. 소설가들은 대개 설계도를 그린 다음에 설계도대로 살을 붙여나간다. 조지 오웰이 그랬고, 에밀 졸라가 그랬다.
김진명은 플롯이 없이 개념만 가지고 써나간다. 자택 서재와 세명대학교 집필실에서 주로 글을 쓰고 오후에는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갈 때도 있다. 대략 그 비중이 40: 40: 20쯤 된다.
문제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다. 글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나는 무조건 산책을 나간다. 솔비투르 앰블란도(Solvitur Amblando). 빈손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대개는 저절로 글이 풀려나간다.
김진명은 글이 막히면 술을 마신다. 그러다 다시 노트북을 켜고 맨 마지막부터 이어서 써 내려간다. 앞에 쓴 부분은 읽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인과 작가는 아침 시간을 선호한다. 요한 볼프강 괴테와 찰스 디킨스도 이른 아침부터 글을 썼다. 시인 정호승도 아침 시간에만 글을 쓴다. 김진명 역시 새벽 시간대를 선호한다. 그래서 중요한 대목은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쓰는 경우도 있다.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는 자정 무렵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가족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다. 집필실로 들어가기 전 거실에서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숨 고르기를 했다. 일상에서 창작으로의 공간 이동. 그 모드 전환의 매개체는 담배였다.
'인간희극' 전 20권을 써낸 발자크에게 집필은 곧 노동이었다. 파리가 잠이 들면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커피를 끓였다. 커피는 그의 밤샘 노동을 지켜보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커피의 힘으로 아침까지 내달렸다. 출판사 사동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발자크는 커피를 '검은 석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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