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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백남준, 템스강변에 다시 꽃피다

차세대 백남준과 테이트모던에 데뷔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19-10-17 12:01 송고 | 2019-10-17 20:05 최종수정
다다익선 설치를 구상하는 백남준(1987).(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뉴스1
다다익선 설치를 구상하는 백남준(1987).(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뉴스1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작품이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에 전시된다. 17일 백남준의 회고전이 런던 템스강변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Tate Modern)에서 열린다. 

테이트모던 회고전은 하나의 사건이다. 백남준이 사실상 런던에 데뷔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백남준(1932~2006)이 활동한 시기가 언제인데 데뷔라는 말을 쓰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백남준의 전성기는 대략적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뇌졸중으로 쓰러진 1996년까지다. 한국인 대부분이 백남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멀티미디어 우주 쇼를 통해서다. 뇌졸중 이후 그는 재활 훈련을 통해 다시 일어나 10년을 더 살았다. 하지만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고 작품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런던 데뷔 장소가 다른 미술관도 아니고 테이트모던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버려진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테이트모던은 2018년 영국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을 기록한 현대미술관이다. 런던을 여행하는 세계여행가들이 가볼 곳 1순위로 꼽는 곳이 테이트모던이다. 

나는 왜 '데뷔'라는 말을 썼을까. '데뷔'라는 말은 대체로 신인 작가나 예술가에게 어울리는 말인데.
런던 테이트모던 전경© AFP=뉴스1
런던 테이트모던 전경© AFP=뉴스1

백남준은 살아생전 런던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한두 번 여행은 했지만.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요즘은 '비디오 아트'라는 용어 대신 '미디어 아트'로 통용된다. 해외에서는 '백남준'이라고 하면 모른다. 남준팩(Nam June Paik)이라고 해야 고개를 끄떡인다.

백남준이 '미디어 아티스트 남준팩'으로 탄생하는 기나긴 여정을 짧은 파노라마로 되짚어보자. 그는 1932년 서울 한복판 서린동에서 조선의 거부였던 태창방직 백낙승의 막내아들로 생을 받았다. 경기고를 다니던 중 그는 정부 방침으로 홍콩에 인삼대리점을 낸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갔다가 6‧25전쟁을 맞는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 도쿄대 문과대 미술사학과에 진학한다. 1956년 도쿄대 졸업 논문이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였다. 그에게 쇤베르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고 시절 음악 교사 이건우였다. 고국으로 돌아가느냐, 유학을 가느냐.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서울은 모든 게 황량했다. 그는 막연히 쇤베르크를 공부하고 싶어 독일로 가기로 한다. 이것은 최상의 선택이었다.

1963년 백남준의 독일 전시회 포스터. 조성관 작가
1963년 백남준의 독일 전시회 포스터. 조성관 작가
2000년 2월11일 구겐하임미술관의 백남준 특별전 포스터
2000년 2월11일 구겐하임미술관의 백남준 특별전 포스터

나이 따지지 않는 연장자들과 교유
 
1958년 그는 우연히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신음악 여름강좌에 참석한다. 여기서 미국의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1912~1992)와 만난다. 존 케이지는 1952년 미국 뉴욕주 우드스탁에서 음악 없는 '4분33초'를 발표해 세계 음악계에 충격을 던진 사람이다. 음악계의 마르셀 뒤샹으로 평가받는 사람이 존 케이지다. 그는 또 뒤셀도르프에서 요셉 보이스(1921~1986)를 만나 교유한다.

독일에서 연장자인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를 알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던 사람들과 예술적 교유가 시작된 것이다. 두 사람에게서 받은 지적 자극으로 인해 백남준의 재능은 꿈틀거렸고, 새로운 예술을 향한 항해에 나섰다. 그가 독학으로 최초의 '비디오 아트'를 선보인 곳도 1963년 독일이었다. 이로 인해 백남준에 대한 독일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 대표로 선발됐고 베스트팔렌주에는 2년에 한 번씩 백남준 어워드를 시상한다.  

미국 뉴욕 머서가 110번지 백남준 아파트 내부와 생전의 구보다 시게코. 조성관 작가 제공
미국 뉴욕 머서가 110번지 백남준 아파트 내부와 생전의 구보다 시게코. 조성관 작가 제공

백남준을 키운 곳은 어디인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활짝 꽃 피운 것은 미국 뉴욕이다. 장르의 벽이 없어 크로스오버(crossover)가 자유로웠던 공간 뉴욕. 팝아트를 탄생시킨 뉴욕에서 그는 오노 요코, 구보다 시게코, 머스 커닝엄, 존 케이지 등과 교유하며 새로운 예술 장르를 구축해나갔다.  

뉴욕에서 그의 비디오 아트를 최초로 인정한 곳은 현대미술의 보고(寶庫)인 휘트니 미술관이다. 에드워드 호퍼, 댄 그레이엄 등의 작품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 전시회는 비디오 아트가 팝아트와 함께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르임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백남준은 2000년 2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다. 생애 첫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였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밀레니엄의 첫 전시회라는 콘셉트에 맞는 작가가 백남준이라고 판단했다. 동양인 최초의 전시였다. 그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비디오 아트를 뛰어넘어 레이저 아트를 선보였다.

독일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뉴욕에서 꽃 핀 미디어 아트. 독일과 뉴욕을 제외하고 백남준을 인정한 도시는 어디일까.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경. 조성관 작가 제공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경. 조성관 작가 제공

파리와 암스테르담이다. 파리는 1978년부터 백남준을 주목했다. 우리가 백남준이라는 예술가의 이름조차 캄캄할 때였다. 파리 현대미술관이 'TV정원'을 전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82년, 백남준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3색 텔레비전'을 전시한다. 프랑스 국기는 빨강, 파랑, 하양 3색이다. 퐁피두 센터 1층 바닥에 텔레비전 384대를 깔아놓고 프랑스 3색 국기를 연출했다. 프랑스인은 그의 상상력에 충격을 받았고, 언론은 백남준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남준이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좋아한 도시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이었다. 자신의 작품을 최고의 가격으로 평가했다는 이유에서다. 생전의 백남준은 은퇴하면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암스테르담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도시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백남준을 낳은 곳은 한국이다. 그를 키운 곳은 어디인가?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세계를 떠도는 문화상인'이라고 표현했다. 이보다 적절한 표현도 없을 듯하다. 독일, 미국,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합심해서 백남준을 탄생시켰다. 한국인은 한반도를 벗어날 때 위대해진다는 것을 증명해낸 사람이 백남준이다. 서로 이질적인 것을 융합시킬 줄 아는 코스모폴리탄적 감각이 미디어 아트를 창조했다.

조성관 작가
현대 미술가들은 국적과 나이와 활동무대를 불문하고 백남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현대 미술가들은 어떻게 보면, '백남준 키즈'라고도 할 수 있다. 국내만 살펴보면 설치미술가 김윤택‧서도호,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등이 대표적이다. 김윤택은 인터뷰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보고 TV‧통신 등 여러 매체를 활용하는 새로운 예술에 흥미가 생겼다"고 말한다.

이번 테이트모던 회고전이 더 특별한 것은 차세대 백남준으로 불리는 이이남 작품이 미술관내 영화관에서 전시된다는 점이다. 살아생전 그토록 인연이 닿지 않았던 런던. 영국은 여전히 소프트파워(softpower) 강국이다. 그 런던에서 백남준과 차세대 백남준이 세계인들과 호흡을 나눈다. 

* 이 글은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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