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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주년 광복절…아직도 뿌리깊게 남은 법조계의 日 잔재

법전에 일본식 표현 '수두룩'… 법무부, 개정작업 착수
수사기관 조서 위주 재판실무도 日잔재…"패러다임 바꿔야"

(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2019-08-15 08:00 송고
제74주년 8.15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덕신하우징 주최로 '광복절 상해 역사문화탐방'을 나선 독립유공자 후손 어린이들이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9.8.15/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제74주년 8.15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덕신하우징 주최로 '광복절 상해 역사문화탐방'을 나선 독립유공자 후손 어린이들이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9.8.15/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시작된 반일(反日) 감정이 유례 없이 치솟고 있고, 사회 여러 분야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 '일제 잔재 지우기'가 계속되고 있다. 15일 74주년 광복절을 맞았지만 법조계에는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일재의 잔재들이 뿌리깊게 남아있다.
법조계에서는 법조인들이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의지를 갖고 국가의 얼을 바로세우기 위한 작업들을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법전에 아직도 가득한 일본식 표현

법조계 일제 잔재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법률의 일본식 표현이다.

일본 식민지를 거치면서 당시 법률을 만들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일본어에 익숙했기 때문에 한글 표현이 아닌 일본식으로 번역을 했고, 그 번역투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가령 형법 제319조 1항 주거침입죄에서 "'사람의 주거'에 침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쓰여있다. 여기서 '사람의 주거'를 우리말 표현으로 쉽게 바꾸면 '사람이 거주하는'이다.

서울의 한 로스쿨 교수는 "일본말은 종속절 수식절에 들어가는 주어의 조사에는 の(노)를 붙인다"며 "해방되면서 '노'를 '의'로 토씨만 바꿔 우리말 문법에 안 맞는 법률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말 표현이 있는데도 굳이 일본식 표현을 놔둔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법무부는 개정 작업에 나섰다. 

법무부는 지난 5월과 이달 9일, 민법 총칙편과 민법 물권편의 어려운 한자어와 일본식 표현 등을 삭제하거나 한글로 바꾼 '알기 쉬운 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窮迫(궁박)'이 '곤궁하고 절박한 사정'으로, '要(요)하지 .아니한다'를 '필요가 없다'로, '算入(산입)하다'를 '계산에 넣다' 등으로 바꾸는 내용이다.

또 '~의하여' 등 일본식 표현도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으로 바꾼다. ‘~의하여’는 일본어 ‘~によって’(니요떼)를 그대로 옮긴 말이다.

지난 2일 법무부는 '지려천박'(知慮淺薄)은 '사리분별력 부족'으로, '작량감경'(酌量減輕)은 '정상참작감경'으로 바꾸는 등 형법·형사소송법에 쓰인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식 표현을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개정하는 내용이 담긴 형법 개정안과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일본식 표현인 '생(生)하였거나'는 '생겼거나'로, '형무소'(刑務所)는 '교정시설'로, '사체'(死體)는 '시체'로, '수진'(受診)은 '진료'로 '직근(直近) 상급법원'은 '바로 위 상급법원' 등으로 표현을 바꾼다.

한 형법 교수는 "형법과 형사소송법이 만들어진 지 70년이 다 돼가도록 일본식 문법을 아직도 완전히 고치지 못 했다"며 "우리 말에는 우리의 혼이 들어가 있다. 제대로 된 법전을 만들어 나라를 반듯하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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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 중심 형사재판도 일제 잔재"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조사한 조서인 '피의자 신문조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재의 형사재판 실무도 일본 식민지의 잔재다.

이 주장을 처음 제기한 것은 한국형사법학회장과 한국형사정책학회 회장 등을 지낸, 형사법의 대가 신동운 서울대 로스쿨 교수다.

신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과거 일본에는 예심판사가 만든 피의자신문조서는 별다른 제한 없이 유죄의 증거로 사용됐다.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증거능력이 없었다. 사법경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아예 증거로 사용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 같은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검찰과 사법경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넓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조선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모르는 조선인들을 상대로 재판을 하려면 통역이 필요했고, 번거로웠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어로 작성된 수사기관의 조서는 이런 번거로움을 없애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경찰 입장에서도 자신들이 작성한 조서의 절대적 증거능력을 갖고 자백을 받으면 유죄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일제 수사는 자연스럽게 자백을 받아내는 데 집중됐고, 고문은 그 자백을 받아내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신 교수는 뉴스1과의 통화에서 "인권을 보장한다면 판사가 만든 조서만 증거능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식민지에서 (수사기관의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면) 판사는 일을 할 게 별로 없고, 사법경찰관이 만든 조서만 봐도 되는 검찰은 조사를 안 할 수 있게 돼 수사기관의 조서에 예심판사가 작성한 조서와 같은 지위를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 밑에서 재판실무를 배운 조선인 법관들은 수사기관 작성 피의자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후배 법관들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졌다.

신 교수는 논문에서 "수사기관의 자백조서에 의존하고 증거조사절차를 극도로 형해화시킨 식민지형 형사재판만이 이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었다"며 "이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사법체계를 구축하면서 자신들의 체험을 후배 법관들에게 전수해 극히 한국적인 형사재판 관행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해방이 된 후 미군정은 이 같은 수사기관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제도를 없애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생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수사기관의 조서를 쓰지 않기에는 부담이 컸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경찰 작성 조서는 내용을 인정할 때만, 검찰 조서는 진정성립이 됐을 경우만 증거능력이 부여되는 현행 제도가 자리잡았다.

신 교수는 다른 나라의 경우 수사기관이 만든 조서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경우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조서를 중심으로 하는 실무가 운영되고 있다"며 "이제는 공판중심으로 재판실무도 변해야 한다. 바뀔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한 고법판사도 "공판중심주의는 단순히 검찰과 법원의 헤게모니 다툼,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라며 "조서 중심 실무는 수사기관과 재판의 편의를 위해 정착된 것에 불과할 뿐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나 실체적 진실 발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판중심주의로 가면서 발생하는 어려움은 다른 제도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해야지, 수사나 재판 진행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공판중심주의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ho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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