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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국치·참상·저항, 그 거리와 공원…서울 다크투어리즘

서울관광재단, 광복절을 맞아 일제 침략 흔적 남은 명소 소개

(서울=뉴스1) 윤슬빈 여행전문기자 | 2019-08-14 10:05 송고
정동전망대. 이하 서울관광재단 제공
정동전망대. 이하 서울관광재단 제공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 반복되는 일상에 무심코 잊고 사는 것들이 있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서울에는 나라를 잃은 울분이 가득했다.

서울관광재단(대표이사 이재성)이 광복절을 맞아 선정한 서울 속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들을 소개한다. 서대문 형무소와 역사박물관 등 잘 알려진 명소 외에 평소 알아채지 못했던 곳들이 너무 많다. 
 
안중근 기념관
안중근 기념관

◇데이트 코스로 알던 '남산 국치의 길'
 
봄에는 벚꽃을 피우고, 가을엔 단풍이 드리우는 그리고 밤에는 낭만적인 야경을 선사하는 남산은 서울의 대표적인 데이트 명소다.
그러나, 이곳은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였다.

강화도조약 이후 서울에 많은 일본인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남산 아래의 충무로 일대에 모여 살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남산 자락에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여러 시설이 들어섰다.

남산 국치의 길은 그 흔적을 따라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성된 길이다.
길은 '한국통감관저 터'에서 시작한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곳에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고, 8월 29일에 조칙이 시행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슬픔을 겪게 된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유명해진 서울교육청 과학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조선신궁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유명해진 서울교육청 과학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조선신궁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현재 통감관저 터에는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기억의 터'가 조성돼 있다.
 
기억의 터를 나와 남산 자락을 따라 리라학교와 숭의여대로 향한다. 리라학교 내 남산원에는 노기신사터가, 숭의여대 교내에는 경성신사터가 남아있다.

노기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을 지휘한 노기 마레스키를 일제가 기리기 위해 조성했고, 경성신사는 침략 전쟁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일본 내 이세 신궁에서 신체 일부를 가져와 만들었다.

숭의학교는 신사 참배에 반대해 자진 폐교했고, 해방 이후 1953년 경성신사 터 위에 다시 숭의학교를 세웠다.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 방향으로 남산을 오르면 한양공원 비석이 나타난다. 한양공원은 1910년 일본인들을 위해 세워진 공원으로 당시 공원의 입구에 세워져 있던 비석이었다. 

비석을 뒤로 하고 길을 따라 남산을 향해 걷다보면 서울교육청 과학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마지막 장면으로 많이 알려져 '삼순이 계단'이라고 부르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였다.

조선신궁은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한 후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규모로 조성한 신사이다. 이 신궁은 해방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었고, 시민들을 위한 남산공원이 조성됐다. 

남산공원엔 안중근 의사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기념관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돌아보고 하얼빈 의거부터 일본 법정과 옥중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꼿꼿했던 그의 지조를 엿볼 수 있는 전시물로 구성돼 있다.
 
조선은행이었던 화폐박물관
조선은행이었던 화폐박물관

◇바쁘게 지나쳤던 '경제 침탈의 길'
 
보신각 남쪽 광교를 시작으로 숭례문을 지나 서울역까지 이르는 구간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지역이었다.

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조선은행이 있었고 맞은편에 있는 현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에는 조선저축은행이 있었다. 신한은행 광교 영업부 자리에는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에는 민족계 은행인 동일은행 등도 있었다.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도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이다.

나석주 의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창숙 선생의 요청으로 조선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하했다.

안타깝게도 폭탄 두 발 모두 불발이 되어 폭파 작전은 실패했지만, 총격전을 통해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사살했다. 나석주 의사는 추격하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한다.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현재의 KEB하나은행 명동 사옥에 있었다. 그 앞에 나석주 의사의 의로움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서 있다.

명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본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크 투어와도 연관이 있다. 이재명 의사는 친일파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 군밤 장수로 변장하여 성당 밖에서 기다렸다.

이재명 의사는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에게 다가가 칼로 복부와 어깨를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완용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이재명 의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에 순국했다.

명동성당
명동성당

명동에서 나와 옛 조선은행 건물로 향한다. 일제는 1911년 조선 은행법을 만들고, 1912년 르네상스 양식의 3층 건물을 준공하여 조선은행을 열었다. 일제는 이곳을 본점으로 하여 한국 금융계를 장악하고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현재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도 일제 침략의 흔적이다. 일본 미쓰이 그룹은 1929년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의 건물로 이뤄진 미쓰코시 백화점을 짓는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했던 안옥윤이 백화점을 방문해 화려함에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그곳이 미쓰코시 백화점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나라를 잃은 임금이 거닌 '고종의 길'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제에 의해 명성 왕후가 시해되자 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데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말한다.

2011년까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부지가 한미 정부의 합의에 따라 우리나라 소유로 바뀌면서,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왔던 길을 복원했다.

힘이 없던 나라의 치욕을 기억하는 고종의 길은 총 길이가 불과 120m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 되지 않는 짧은 코스이다. 궁녀가 타던 가마에 몸을 싣고 도망쳐야 했던 고종의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10분이 마치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자 남편으로서 고종이 겪었을 슬픔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고종의 길 끝에 다다르면 아관파천의 목적지인 구 러시아 공사관 건물이 나타난다. 6.25 전쟁 당시 파괴되어 첨탑과 지하 통로만 남아있다.

현재는 안전 문제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밖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환구단
환구단

고종은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다 외국 공관이 밀집해 있던 정동의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격동의 시대로 흘러가는 조선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내려와 정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울어가는 조선의 비운을 간직하고 있는 덕수궁 중명전을 만날 수 있다.  

1905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넘나들며 3일간 고종과 대신들을 압박했다.

결국 중명전에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5년 후에 일제식민지가 되는 한일병합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명전을 나와 덕수궁까지 둘러보았다면 조선 호텔 앞에 있는 환구단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환구단에서 하늘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의식을 행한다.
 
망우리 공원 전망대
망우리 공원 전망대

◇유관순·안창호가 잠들어 있는 '망우리 공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현재의 동구릉을 찾았고, 무학대사가 이곳은 선왕보다는 이성계의 능지로 더 적합하다고 추천했다.

무학대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성계는 고개에 올라서서 동구릉을 바라보며 '이제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말했다 하여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성계는 망우 고개에서 근심을 잊었지만, 현재의 망우리 공원에는 나라에 대한 근심걱정이 가득했던 독립투사부터 유명 예술인까지 민족의 독립과 계몽을 위해 노력한 선조들이 잠들어있다.

1933년 미아리 공동묘지가 가득 찰 것에 대비하여 망우리에 70만 평에 달하는 부지를 공동묘지로 조성했다. 일본은 서울 시내에 남아있던 공동묘지를 망우리나 미아리로 옮겼다.

최근 망우리 공원은 숲과 산책로를 따라 애국지사의 묘역을 만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안창호, 한용운, 지석영, 이중섭, 박인환 등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인물의 묘지가 조성됐다.

만해 한용운 묘지
만해 한용운 묘지

산책로에서 100m 거리 안팎에 묘지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걸으며 위인들을 만날 수 있다.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힘썼던 위인들을 만나러 가니 무더위에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유관순 열사가 모셔진 합장비도 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는데 일제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 어딘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이태원의 무연고 묘지가 망우리로 이장되면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결국 찾지 못했으니 이태원 합장비와 함께 분묘를 만들어 그녀의 넋을 위로한다.  

안창호 선생의 묘지가 있던 터도 만날 수 있다.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 흥사단, 임시정부 등에서 활약하며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지도자로 건국훈장 최고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위인이다.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했던 적이 있는 유상규는 외과 의사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조선인들에게 무상치료도 활발히 할 정도로 애국하는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유상규는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피부질환)에 감염돼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안창호 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상규 의사 위쪽에 잠들어 있다가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묘지를 이장했다.
 
공원에 안창호 선생과 더불어 대한민국장을 받은 분이 한 명 더 있으니 바로 한용운 시인이다. 우리에게는 '님의 침묵'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한용운 시인은 민족대표 33인으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스님이었던 그는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망우리 공원에는 일본인 무덤도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의 산림이 황폐해 가는 것을 보고 한국의 산림녹화에 힘을 썼다. 그는 한국의 문화가 좋아 한국말을 쓰고 한복을 입고 진정한 우리의 이웃으로 살았다.


seulb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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