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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의 욜로은퇴] 남자와 여자의 페이소스

(서울=뉴스1)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 2019-03-08 15:01 송고
편집자주 100세 시대, 누구나 그리는 행복한 노후! 베이비 부머들을 위한 욜로은퇴 노하우를 전합니다.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 뉴스1
얼마 전 영화 <더 와이프(The Wife)>를 보면서 <대부> 영화가 오버랩 되었습니다. <더 와이프>는 여자가 남 모르게 간직한 깊은 슬픔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대부>는 영광에 가려진 남자의 슬픔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문이 생겼습니다. “남녀의 이런 다른 슬픔을 서로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은 자신도 이해를 못 하는 마당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이를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우선, 두 영화에서 나타난 남자와 여자의 페이소스(깊은 슬픔)를 살펴 보겠습니다.

2019년 2월에 개봉한 영화 <더 와이프(The Wife)>는 2003년 ‘맥 울리처’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다만 소설에서는 남자가 지역의 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반해 영화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설정이어서 메시지가 과장되게 다가오는 점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에서 남자는 모두 ‘찌질이’로 나옵니다. 소설가가 여자이니 여자 눈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에 여주인공은 능력과 감성을 겸비하여 찌질한 남자를 포용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노벨상을 받는 남편은 사회적 명성과는 전혀 달리, 무능력과 찌질함의 대명사입니다. 글은 형편 없이 쓰면서 입만 살아 있고,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도 아내가 하루 8시간씩 글을 써서 된 것입니다. 남자는 여기 저기서 바람 피우고 만나는 여자마다 호두에 사인을 해주면서 작업을 겁니다. 심지어 노벨상 받으러 스웨덴 가서도 젊은 여자에게 호두에 사인해주려다 퇴짜를 맞습니다. 감정적으로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화 난다고 노벨상 메달을 차 밖에 던져 버릴 정도입니다. 아들과 소통도 제대로 못해서 티격태격하고, 대인관계는 아내가 옆에서 코치해주어야 합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여서 아버지가 자신의 글을 인정해주기만을 바라면서 자신 없이 인생을 살아 갑니다.

아내는 이 모두를 포용합니다. 남편은 노벨상 만찬이 끝난 뒤 아내와 다투게 됩니다. 그런데, 아내가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헤어지자고 말한 뒤 짐을 싸서 나가려 하자 남자는 그만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제 아내는 자신이 글을 썼다고 밝혀도 괜찮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통 크게 포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사실을 폭로하려는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전기(傳記) 작가(역시 남자)에게 “만일 남편이 글을 쓰지 않았다는 걸 전기에 밝히면 소송을 하겠다”고 말하죠. 아내 조안(글렌 클로스 粉)은 남편, 아들, 남의 뒤를 켜고 다니는 전기작가 모두를 포용하며 모순 덩어리의 현실을 안정시킵니다.

<더 와이프>에서는 여자가 모든 것을 참고 포용하면서 침묵하는, 일종의 여성만이 간직하는 페이소스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포용하고 수용하며 많은 것을 낳고 길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깊은 슬픔입니다. 이 페이소스는 화병과 우울증으로 연결됩니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 희생하던 우리나라 여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 영화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남자들은 오히려 <대부(Godfather)> 영화에 열광합니다.
마피아 두목이자 아버지인 돈 꼴리오네의 뒤를 막내 아들 마이클(알 파치노 분)이 잇습니다.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큰 형이 죽으면서 패밀리를 위해 부득이 선택한 길입니다. 자리에 오른 뒤에는 패밀리를 위해 잔인한 복수를 단행하며, 심지어 배신한 바로 위 형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마이클은 오직 가족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참담합니다. 시골에 피신했을 때 결혼식을 올린 약혼녀는 총격으로 바로 사망합니다. 그 뒤 결혼한 아내는 마이클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버립니다. 아들은 마이클의 뒤를 잇지 않고 가수의 길을 택하고, 목숨처럼 사랑했던 딸은 자신을 겨냥한 적의 빗나간 총알에 맞고 숨집니다. 그리고, 자신은 노년에 의자에 앉은 채 앞으로 고꾸라져 쓸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대부>는 마이클이 한 일은 무엇이며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누구도 이해 못해 주는 마이클의 ‘깊은 슬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이 영화를 보고 코 끝이 찡해 옵니다. 사회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가운데 가족과 멀어지는 게 오버랩 되기 때문입니다. 돈 버는 기계처럼 살다가 퇴직하여 가정으로 돌아 오면 아무도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갑충으로 변해 버린 ‘그레고르 잠자’가 되는 거죠. <변신>은 보험일을 하며 부모님과 여동생을 먹여 살리려 발버둥치던 주인공이 갑충으로 변하자 가족 모두 외면하는 가운데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변신>에서는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깊은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부부로 가정을 이루지만 각 자의 페이소스를 갖습니다. 페이소스는 의식의 깊은 저변에 깔려 있으면서 행동을 결정합니다. 부부의 다른 페이소스는 다른 행동을 가져오게 되고 이로 인해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년에 부부들이 졸혼(卒婚)을 하거나 한 지붕 밑에서 냉담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페이소스를 이해하면 이 문제도 해결되겠죠. 하지만, 이해도를 높여 갈 수 있지만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의식 저변은 모순의 결합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손톱만한 간극은 우주만큼 넓을 수 있습니다. 논리적 이해를 통해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궁극적으로는 포용이 필요합니다. 이해는 안되더라도 그 사고와 행동을 포용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당신 말이 옳소’하는 이 한 마음이면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 숱하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모두 완성하는 게 사랑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완전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보다 불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게 노후의 행복을 가져옵니다. 남녀의 메울 수 없는 깊은 슬픔을 극복하는 길은 사랑에 있습니다.

※ 이 글은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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