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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한 장인도 재개발에 쫓겨 청계천을 떠났다"

'재개발 재검토' 발표에도…상인 '백년가게 특별법' 촉구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 2019-01-24 06:00 송고 | 2019-01-24 15:26 최종수정
17일 일명 청계천 공구거리로 불리는 서울 중구 입정동에 재개발 반대 포스터가 붙여있다. 서울시가 10여년 전부터 추진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에 따라 공구거리를 포함한 서울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상가 철거가 본격화하면서 공구상가 일대 세입자들이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2019.1.17/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청계천에는 외국 유명 메이커 제작자, 미술가들이 몇 달씩 호텔에 묵으면서 주문제작을 하고 작품을 받아가는 '마에스트로(명장)'가 있습니다. 한국 최초로 지퍼 기계를 제작하신 분도 있어요. 이런 분들이 재개발에 밀려 떠나고 있습니다."

지난 8개월간 서울 중구 청계천과 을지로 상가 일대를 돌며 노포(老鋪·오래된 가게)를 취재한 안미경 다큐멘터리 작가의 말이다. 그는 "청계천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술 원형을 보존하는 명장이 곳곳에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청계천 장인'은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7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온 노포가 헐릴 운명에 처하면서다. 

안 작가는 "하루는 수표지구에 있는 한 상점을 찾았다가 영국 가디언지가 그분의 기술을 취재하고 있었다"며 "기술장인이 쫓겨나고 한국 공업사(史)를 스스로 지우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토로했다.

서울시가 지난 23일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계획을 변경해 을지면옥·양미옥 등 노포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재검토하고 밝혔지만 청계천·을지로 노포상과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다.

청계천·을지로에 지상 20층 규모 주상복합건물을 짓겠다는 재개발 사업은 일단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지역 역사에 대한 고민과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생존권 보장 없이는 제2, 제3의 '청계천·을지로 사태'가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는 여전하다. 

◇재개발 멈췄지만…'백년가게 특별법' 제정 목소리

서울시가 재개발 사업 '전면 재검토'를 발표한 날, 백년가게 수호 국민운동본부'(백년가게본부)는 서울 을지로동 주민센터에서 소상공인 증언대회를 열고 '백년가게 특별법' 정책협약식을 진행했다.

특별법의 구체적인 골격은 아직 갖춰지지 않았지만 △임차인 생존권 보장 및 합리적인 보상 △역사성이 인정된 유산의 보존이라는 문제의식을 골자로 한다.

증언대회에 나선 쌔미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조직국장은 "지난해 '궁중족발' 사태 이면에는 건물주의 횡포와 이를 묵인하고 합법화해 준 상가법, 불법 강제집행이 복합된 사연이 있다"며 "상가임대차 갱신요구권 기간이 10년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건물주와 임대료 문제로 갈등을 빚다 폭행으로 번진 궁중족발 사건 터지면서 상가임대차 갱신요구권이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됐다. 하지만 적게는 30년에서 길게는 70년간 상점을 운영한 노포상들은 적용대상이 아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도시개혁센터 팀장도 "상가법 개정에도 재개발·재건축 문제는 여전히 사각지대로 존재해 왔다"며 "시와 구청은 정비구역만 지정하고, 재개발과 임차인 퇴거는 시공사와 건물주에게 넘긴 채 쫓겨나는 세입자를 나 몰라라 하는 행태가 반복되는 한 세운상가 문제는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7일 서울 중구 청계천 공구거리에서 상인들이 재개발반대 조끼를 입고 있다. 서울시가 10여년 전부터 추진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에 따라 공구거리를 포함한 서울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상가 철거가 본격화하면서 공구상가 일대 세입자들이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2019.1.17/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쫓겨나는 장인, 헐리는 유산…"백지 재개발 그만"

특히 서울시가 수십년 기술 장인들이 모인 '세운3구역'에 대한 보존대책을 빼고 '재검토안'에 발표한 점도 공분의 대상이 됐다.

서울 중구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28년간 기계공구를 팔아온 박헌식씨(53)는 지난해 겨울 정든 터전을 떠나 경기도로 이사했다. 공교롭게도 12월25일 크리스마스였다.

"기계공구판매업을 천직으로 알고 젊음을 다 바쳤다"는 박씨는 "상가 재개발을 막기 위해 서울시청과 중구청을 오가며 노력했지만 결국 쫓겨났다"며 "눈물을 훔치며 이삿짐을 옮기던 그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울먹였다.

안 작가도 "한국 최초로 지퍼를 만든 장인도 철거대상으로 포함돼 서울 문래동으로 떠났고, 1950년대 원형을 그래도 간직한 건물도 모두 헐릴 운명"이라며"산업유산을 허무는 '백지 재개발'을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백년가게본부와 함께 특별법 정책협약에 나선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서울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도시'라는 말이 있다. 60년이든 100년이든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기 때문"이라면서 "역사와 가치에 대한 보존 노력 없이 그냥 철거하고 새로 짓는 관행을 바꿔야 할 것"이라며 백년가게 특별법 제정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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