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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면 탱크도" 도심 제조업 산역사…'입정동' 사라지나

[을지로 재개발①]도시재생 외면…다 헐고 주상복합
'을지유람' 옛길 탐방 만들더니 이제와서…"기막혀"

(서울=뉴스1) 유경선 기자 | 2019-01-14 06:00 송고 | 2019-01-14 09:15 최종수정
12일 오후 서울 중구 입정동 세운3구역 상가들이 철거된 모습.2019.1.14/뉴스1© News1 유경선 기자
12일 오후 서울 중구 입정동 세운3구역 상가들이 철거된 모습.2019.1.14/뉴스1© News1 유경선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역 일대 입정동(笠井洞)은 '갓(笠) 만드는 동네'였다. 갓을 만드는 장인의 집에 우물(井)이 있었던 데서 입정동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청계천 남쪽에 자리잡은 입정동은 동쪽으로는 세운상가 직전까지, 서쪽으로는 서울청소년수련관까지 뻗어 있다. 
'갓 만드는 동네'는 제조의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서 기계·공구·전기·금형·금속과 관련 상점들이 들어선 '도심 제조업' 단지가 됐다. 이 지역 장인들은 '주문만 하면 탱크까지 만들어준다'고 할 정도로 실력이 자자했다.

제조업 관련 상점들과 사람들의 주린 배를 달래던 노포(老鋪)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을지로의 모습에 적잖은 사람들이 마음을 뺏겨, 이 지역은 최근 '핫 플레이스'로 등극하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에 '#을지로'를 검색하면 '을지로 감성'을 예찬하는 게시글이 수십만 건 쏟아진다.

하지만 입정동의 '제조 역사'는 머잖아 끝을 보게 될 전망이다. 지난해 10월 이 지역에 한호건설이 시행사로 선정된 '세운3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관리처분인가가 나면서 상점과 노포들이 모두 헐리고 26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게 됐기 때문이다.

'세운3구역'으로도 불리는 입정동 지역에서는 관리처분 인가가 나자마자 급속한 철거와 이주가 이뤄지고 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을지면옥'을 포함해 400여개 점포가 이 구역에 속해 있다. 구역 내 청계천변 상가들은 이미 대부분이 헐렸다. 세운 3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도 차차 이 같은 수순을 밟게 될 예정이다.
멀게는 조선시대부터,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인 1920~1930년대부터 이어져 온 '제조의 명맥'은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재생'의 가치를 내세웠던 박원순 서울시장 체제에서 끊기게 됐다. 철거가 한창 진행 중인 입정동 일대를 돌아봤다.

입정동 일대 세운3구역 재개발 조감도(한호건설 홈페이지 갈무리).2019.1.14/뉴스1 © News1
입정동 일대 세운3구역 재개발 조감도(한호건설 홈페이지 갈무리).2019.1.14/뉴스1 © News1

◇'을지면옥' 동네 400여개 점포 강제이주…재개발 반대 천막농성

이 지역에서 25년 동안 장사를 했다는 강문원씨(59)는 지난달 7일부터 청계천 관수교 주변에서 재개발에 반대하며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강씨는 "내가 원하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로지 보존"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재개발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면서 "청계천 지역은 하나의 제조업 생태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인근 예지동 금은방부터 멀리 충무로 인쇄소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걱정스럽게 내뱉었다.

그는 "보존하자는 뜻을 내보이자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 싶어 결국 자리를 폈는데, 보존하는 방향으로 바뀔 때까지 천막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한 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을지다방'을 40년 가까이 운영해온 박옥분씨(62·여)도 "말로는 '도시재생'을 외쳐놓고 이렇게 이주대책도 없이 밀어붙이는 게 말이 되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중구청이 운영하는 을지로 옛길 탐방·해설 프로그램 '을지유람'을 언급하면서 "우리들이 동물원 원숭이인 것처럼 외부인들에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을지로'를 구경하게 하더니, 이제 와서 재개발을 한다는 소리에 기가 막히다"고 쓴소리를 뱉었다.

박씨는 쌍화차를 만들던 손길도 멈추고 속사포처럼 서운함을 쏟아냈다.

"재개발 얘기가 나온 지가 30년도 넘어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들 얼마간은 불안한 상태에서 장사를 해왔어요. '을지유람' 같은 걸 만들길래 진짜 재개발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사비용 쥐어주고 '옮기면 되잖느냐'는데, 장사를 일구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데요. 이미 옮긴 분들도 있는데 내쫓기다시피 나간 거랑 다름없어요."

박씨의 입에서 '재개발'이라는 단어를 들은 다방 안 손님들이 일제히 술렁이기도 했다. "재개발이 되는 게 정말이냐"며 탄식하는 손님도 있었다. 박씨는 "어제(10일)도 젊은 아가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재개발 소식을 알고는 '말도 안 된다'고 퍽 슬퍼하더라"고 전했다.

을지다방 사장 박옥분씨(62·여)가 손님이 주문한 차를 만들고 있다.2019.1.14/뉴스1 © News1
을지다방 사장 박옥분씨(62·여)가 손님이 주문한 차를 만들고 있다.2019.1.14/뉴스1 © News1

50년 역사의 레이저 금속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김광세씨(53)는 다음달 초 공장을 경기도 하남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제 공장은 우리밖에 안 남았다"며 김씨가 씁쓸하게 웃었다.

김씨도 박씨처럼 "30년 넘게 얘기가 없길래 재건축이 안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가 '지역 상인들이 거의 이전할 곳을 마련해 점포를 옮겼다'고 말한 사실을 전하자 김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30년 넘게 일하던 사람들이 옮기고 싶어 갔겠어. 여기는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어디로든 다같이 옮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여기저기 흩어져서 옮겨가기 시작하면 끝이야."

김씨는 20년 전에 레이저로 직접 만들었다는 간판을 가리키면서 "이 간판도 을지로에서 탄생했다"며 "경기도 하남으로 공장을 옮기는데 이 간판도 떼어 가져갈까 하고 있다"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면서 "우리는 떠나지만 나머지 사람들이라도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연결된 생산라인…청계천 제조업 생태계 연쇄 몰락 우려

떠나는 사람도 아쉽지만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마음도 못잖게 섭섭하다. 당장 철거를 앞두고 있지는 않지만 수십년 함께한 이웃들에 하나 둘 인사를 고하는 상인들과 을지로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에 이어 57년 업력의 곱창집을 운영하는 서홍숙씨(52·여)는 "수십년 동안 주변에서 일하며 끼니를 해결하러 오시던 분들이 떠나가 정말 섭섭하다"며 "전기나 수도가 고장나면 와서 뚝딱 고쳐주시곤 했는데, 이제 주상복합이 생기면 그런 정서도 없이 삭막해지지 않겠냐"고 아쉬워했다.

23세 때부터 금형 제작 일을 해왔다는 이달원씨(59)는 "우리나라 발전에 제조업 기지인 이런 지역이 역할을 했는데, 다른 나라는 이런 데를 보존한다고 하는 와중에 우리는 아파트나 올리겠다니 미친 소리"라고 일갈했다.

이씨는 "이 가게는 안 헐린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면 나도 장사를 접을 생각"이라며 "이 사람은 이걸 잘하고, 저 사람은 저걸 잘한다는 걸 속속들이 알고 있었는데 이제 다 흩어져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생산 라인'과도 같았던 이곳의 의미가 다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입정동을 찾은 시민들도 재개발 소식에 혀를 내두르면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서씨의 가게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이모씨(42·여)는 "주상복합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고, 이 지역은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킨 제조업 역사의 현장인데 꼭 그래야만 할지 의문"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재은씨(27·여)는 "복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동네를 참 좋아했는데, 이곳마저 획일화된 강남처럼 되는 거냐"며 안타까워했다.

'입정동'이라 쓰인 동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조모씨(58)는 "예부터 서민생활용품을 만들어온 곳인데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니 피맛길의 실패와 다르지 않다"면서 "논의과정도 없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서울시를 성토했다.

을지면옥에서 식사를 마친 노모씨(70·여)도 "이 가게를 다닌 지 벌써 수십년"이라며 "안그래도 재개발 얘기를 하면서 저녁을 먹었는데 너무 아쉽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시민사회단체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는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재개발을 멈추고 이 지역을 '제조산업 문화특구'로 지정하라는 요구가 담긴 서명문을 14일 자정까지 받아 중구와 서울시 및 국토교통부에 전달할 예정이다.

을지로 지역 재개발에 반대하며 상인들이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2019.1.14/뉴스1 © News1
을지로 지역 재개발에 반대하며 상인들이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2019.1.14/뉴스1 © News1



kays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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