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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절제와 원숙함의 부시 리더십

(서울=뉴스1) | 2018-12-05 11:14 송고 | 2018-12-05 11:18 최종수정
뉴스1 © News1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조지 H.W. 부시의 타계를 애도하는 추모의 물결이 미국을 휘감고 있다. 부시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었지만, 미국에서 그에 대한 추모 감정은 정파를 초월하는 것 같다. 그가 죽은 후 이렇게 미국인의 추앙을 받는 것은 한 미국 신문의 표현처럼 ‘절제와 원숙함을 갖춘’ 정치 지도자의 자질이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인들에게도 부시 대통령은 기억에 깊게 새겨진 인물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이 43대 대통령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40여만 명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사막의 폭풍’ 작전, 즉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한국의 젊은이들도 그 일원으로 아라비아 사막에 파견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1991년 12월 7일 아침 하와이 호놀룰루의 펀치볼 국립묘지와 진주만 해군 부둣가에서 부시 대통령이 두 차례 연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7시 58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한 지 딱 50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이날을 맞아 미국 정부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한 것이다.

그때 미국은 걸프전에서 승리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황이 안 좋았다. 일본은 제조업 강국으로 미국을 압도하면서 대미 무역흑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일본 기업들은 록펠러센터와 컬럼비아 영화사 등 미국의 랜드마크 기업을 게걸스럽게 사들이는 게, 마치 근래 중국이 미국과 유럽에서 기업사냥에 나서는 것 같았다. 보통 미국 시민들은 위협을 느꼈다.

미국 언론의 관심은 미국이 일본을 어떻게 혼내주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주만 50주년 기념식에서 부시 대통령이 일본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시는 그날 연설에서 일본을 겨냥하지 않았고, 화해를 강조했다. 2차 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 15만 명을 강제 수용했던 미국의 정책을 반성했다. 그리고 고립주의가 비극을 부른 역사적 교훈을 되새겼다.

그날의 절제된 연설은, 그해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낸 후 100시간 만에 지상전을 끝냈던 그의 결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부시는 요즘 한국식으로 말하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아이였다. 대공황으로 미국인들이 고통 받을 때 그는 가정부와 운전기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미국 동부의 부잣집 아들이었다. 아버지 스캇 부시는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정·재계의 쟁쟁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미국 최고의 명문 필립스 고등학교에서 익힌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절제감이 그의 생애를 지배했다고 한다.

부시는 고3 때 일본의 진주만 침공을 전해 듣고 해군 조종사에 지원했다. 그는 1944년 태평양에서 출격했다가 일본 군함의 대공포화에 맞아 추락했고 미국 잠수함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존 케네디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2차 대전의 참전 영웅인 셈이다.

그는 1948년 예일대를 졸업했다. 필립스고교-예일대 출신의 부시는 기회가 기다리는 동부가 아니라 낯선 땅 텍사스로 들어가 아버지 친구가 경영하는 석유회사 말단 사원이 되었다. 그 후 텍사스는 그와 그의 두 아들의 정치 배후지가 되었다. 그의 정치생활은 1966년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하여 성공하며 시작되었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갈 무렵 닉슨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그를 불러 백악관에서 일할 것을 제의했다. 부시는 백악관이 아니라 유엔대사를 원했고, 닉슨 대통령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그는 국제외교무대에 발을 디뎠다. 유엔대사, 베이징 주재 미국연락사무소 대표, 중앙정보국(CIA) 국장,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등 화려한 요직을 섭렵했다.

부시는 1980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예비후보로 나섰지만 로널드 레이건에 밀려 결국 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후보 티켓을 땄다. 레이건이 승리하자 부시는 8년 동안 부통령으로 활동했다.

부시는 케네디나 레이건처럼 대중적 매력을 내뿜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화려한 경력과 현직 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1988년 예비선거 공화당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3위에 머물면서 경선 탈락의 위기를 맞는 듯했다. 뉴햄프셔 예비선거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훗날 그의 비서실장이 된 뉴햄프셔 주지사 존 수누누였다. 수누누는 부시에게 특권층 이미지를 내던지라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부시는 그의 충고대로 차에서 뛰어내리며 보통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접근하는 이미지 변화로 예비선거를 석권하여 공화당 후보가 되었고 끝내 백악관에 입성했다.

대통령으로서 부시의 리더십은 대외정책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풍부한 경험과 절제의 지혜로 독일 통일, 동구의 민주화, 소련 해체 등 냉전 해체를 연착륙시키는 데 큰 지도력을 발휘했고, 걸프전에서 거의 인명피해 없이 이라크 군을 격퇴했다. 부시 대통령은 “우리의 목표는 이라크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쿠웨이트를 해방시키는 것이다”고 당초 선언한 대로 미사일과 전폭기 공습이 끝난 후 100시간 안에 지상전투를 끝냈다. 당시 여론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치켜세웠고 야심가를 유혹할 분위기였지만, 부시는 거기서 멈추는 자제력을 보였다.     

그러나 부시는 1992년 대통령 재선에 실패했다.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실업률이 7%를 웃도는 경기침체와 재정적자였다. 부시가 이에 대응하지 못한 것은 보통 미국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무엇인지를 감지하지 못한 그의 현실 인식이었을 수도 있지만 시대적 추세이기도 했다. 여기에 민주당 대통령후보 빌 클린턴의 선거 참모 제임스 카빌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선거 슬로건을 만들면서 90%를 넘던 부시의 지지율이 무너져 내렸다. 둘째 요인은 보수층 표를 잠식하는 무소속 제3후보 로스 페로의 등장이었다. 선거결과 득표율 ‘클린턴 43%’ ‘부시 37%’ ‘페로 19%’가 이를 말해 준다.

부시 대통령의 리더십은 냉전해체와 함께 격변하는 세계를 안정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 미국의 유권자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부시는 민심의 저변에 있는 미국인의 불안 심리를 달래주지 못했던 것이다. 실리콘밸리가 번창하면서 미국경제는 되살아나고 그게 클린턴 정책의 성공으로 치부되었다. 종종 정치란 이런 것이다.        

부시는 단임 대통령으로 물러났지만 그 많은 재임 대통령들이 하지 못한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후임자에 대한 격려와 솔직한 충고였다. 그는 백악관을 떠나는 날 그를 정치적으로 침몰시켰던 후임 대통령 클린턴에게 “당신의 성공이 바로 미국의 성공이다.”라는 편지를 남겼다. 나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공직의식이 내포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같은 공화당 출신 트럼프 대통령을 후보시절부터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이해되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까지 상통하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다.        

요즘 전 세계 곳곳에서 정치가 거칠게 돌아가는 것을 보며 절제와 품위를 중시했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정치 리더십을 생각해보게 된다. 냉혹한 권력의 세계에서 부질없는 기대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품격은 국민에게, 또 세계 시민들에게 필요하다. <뉴스1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