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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즉위 600주년…과학기술 '혁신의 발자취' 남기다

해시계·물시계·측우기·신기전·훈민정음 등 업적
현시대 배워야할 점…"과학기술 리더십·인재양성"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2018-09-19 07:05 송고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 News1 유승관 기자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 News1 유승관 기자

19일은 조선시대 과학기술을 꽃피운 세종대왕(1397~1450)이 즉위한지 6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종대왕은 1418년 음력 8월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해 32년간 재위하며 백성을 두루 살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룬 성군이었다. 특히 이 시기는 한국 전통 과학기술의 전성기라고 불릴만큼 괄목할만한 성과가 많았다.
백성의 삶과 철저하게 맞닿아 있는 시각 측정도구, 기상 측정도구는 물론 우리나라 한글인 훈민정음이 대표적인 성과다. 세종대왕 시대 이후 과학기술이 천대를 받고 주류로 인정받지 못해 침체되기도 했지만 세종대왕 시절에 남긴 성과들은 아직도 찬란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 진정한 '과학기술혁신 리더' 세종대왕이 이룩한 눈부신 과학기술 성과를 알아보고, 현 과학기술의 도약을 위해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짚어본다.

◇백성을 위한 '해·물시계, 측우기, 훈민정음'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세종대왕 때에는 무려 10종의 시계가 발명됐다. 앙부일구, 지평일구, 자격루, 옥루 등이 대표적이다. 백성들이 자주다니는 곳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설치했다. 특히 자동 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기계장치 발명에 큰 도움이 됐다.

세종 23년(1441년). 세종대왕은 "눈금을 새겨 빗물의 깊고 얕은 치수를 살펴 보고하라"라고 명했다. 기상현상과 밀접한 농사가 백성들의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던 이때 측우기와 수표 기상 측정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원시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던 방법에서 벗어나 측우기를 이용해 정확하게 비의 양을 측정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바람의 방향과 속력을 재는 풍기대, 계절의 변화와 24절기를 알려주는 규표 등이 개발됐다.
우리나라 독자적인 천문학도 세종대왕 시절 발전됐다. 고대 수리 계산법에서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정리해 '칠정산내편'을 만들었으며, 아라비아의 천문 계산법을 검토한 후 '칠정산외편'을 만들었다. 또 천문 기상의 관측, 역서의 제작, 풍수지리에 관한 일을 서운관에서 맡게 했다. 당시 세종대왕은 "천문을 추정해 계산하는 일이란 전심 전력해야만 그 이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계산된 일식과 월식의 시각과 분수가 비록 측정한 숫자와 맞지 않더라도 서운관으로 하여금 모두 기록하게 해 뒷날에 대비토록 하라"라고 명했다.

또 조선의 비밀병기 신기전이 1448년 개발됐다. 신기전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로켓 추진화살이다. 크기와 작동 형태에 따라 소·중·대 신기전으로 나뉜다. 자주적인 국방과학의 시작이다. 이밖에 의약학과 국산 약재 연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 세계 최고의 과학적 언어 '훈민정음'도 최고 성과로 꼽힌다.

훈민정음 용자례© News1
훈민정음 용자례© News1

◇진정한 기술혁신 리더…파격적 인재등용

세종대왕 시대의 인재들이 집약지는 '집현전'(集賢殿)이었다. '현인을 모은다'라는 의미다.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이곳에 모아 정치·역사·문학·천문·농업지리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당시에 문관을 뽑는 과거시험은 3년마다 행해졌다. 전국에서 33명만을 뽑았는데 집현전에 근무했던 학자 중 절반이 과거시험에서 상위권에 들었던 수재들로 알려진다. 또 이들의 연령도 20대 초반으로 매우 젊었다는 것도 특징이다.

세종대왕은 이들을 특별히 대접했다. 궁궐 요리사들이 집현전 학자들의 식사를 챙겼고, 사무적인 업무도 제외시켰다.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특별휴가와 같은 개념으로 휴식시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세종의 과학기술혁신 리더십으로 32년의 재위기간동안 정치·역사·문학·언어학·지리·윤리·법률·음악·농업·의학·천문 등 다방면에서 서적 80종, 보고서 수백종이 집현전을 통해 편찬됐다. 이러한 성과물들은 백성들의 실생활에 적용돼 백성들의 삶의 질을 크게 높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젊은 인재를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로 길러내기도 했다. 장기적인 안목의 인재육성 방식을 알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 신분을 막론하고 적극적인 인재등용도 중요시했다. 재능이 있는 자라면 신분을 막론하고 중용했다. 장영실은 물론 무관출신 과학자 이천은 세종의 인재관을 잘 보여준다.

이천은 태종 2년인 1402년에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무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뿐 아니라 병기를 다루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이를테면 화포와 군선을 개량에 능했다. 세종은 그에게 금속활자 주조의 중임을 맡겼고, 이천은 장영실·이순지 등과 함께 1420년에 경자자를, 그리고 갑인자를 완성한다.

이에 대해 현 시대의 과학자들은 세종대왕의 과학기술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입을 모은다. 양수석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총연합회 회장은 "15세기 조선을 과학기술의 강국으로 이끈 세종시대의 집현전 시스템을 탐구해 21세기 집현전인 정부 출연연구기관이 혁신해 나갈 방향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숙경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부회장은 "전현전의 파격적인 대우, 다양한 인재등용, 국가 정책과의 연계성을 본받아서 국민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과학기술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soman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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