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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광주보다 더 아파했다…5·18 푸른눈의 목격자들

(광주=뉴스1) 전원 기자 | 2018-05-18 15:53 송고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8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5.18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 이들의 배우자들이 참석해 있다. 왼쪽부터 故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여사, 故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故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 2018.5.1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8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5.18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 이들의 배우자들이 참석해 있다. 왼쪽부터 故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여사, 故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故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 2018.5.1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그들은 광주보다 더 광주의 참담한 현실을 아파했다. 통신은 끊기고 도로는 막혔으며 신문과 방송은 가위질당하던 그 때, 푸른 눈의 목격자들은 철저히 고립된 광주를 증언하고 세계에 알렸다.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푸른 눈 목격자들의 가족이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고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여사, 고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여사 등이다.

이들은 이날 기념식에 나란히 앉아 50여분 간 진행된 '38주년 기념식'을 묵묵히 지켜봤다. 동시통역 이어폰을 끼고 공연과 내레이션을 들으며 숙연해지고 눈시울을 붉혔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함께 불렀다.

특히 고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여사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헌틀리 여사는 편지에서 "38년 전 광주시민들을 보고 그 열정에 감탄했다. 광주시민들의 인간애는 너무나도 뜨거웠다"며 "헌혈하러 찾아온 시민들에게 너무 많은 피를 나눠줘서는 안된다고 말리기까지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남편은 마지막까지도 광주에 가고 싶다고 했고, 광주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 사랑했던 광주가 이제는 정의의 이름이 됐다"며 "우리의 한국에 대한 사랑을 잊을 수 없고 끝이 없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헌틀리 목사(한국명 허철선)는 1980년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면서 계엄군에 살해당한 희생자 시신 사진과 엑스레이 필름 등 챙겨 5·18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그는 광주 도심과 병원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광주의 상황을 글과 함께 해외에 알렸다. 특히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관련 내용을 전달하기도 했다.

5·18이 발생한지 4년 뒤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한 후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지난해 6월26일 타계했다.

헌틀리 목사는 생전에 "광주에 가고 싶다",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했고, 유가족은 고인의 뜻을 기려 이날 기념사업회와 안장식을 가졌다.

힌츠페터의 부인 브람슈테트 부인은 이날 망월동 구묘역(민족민주열사 묘역)을 찾아 힌츠페터 추모비를 참배했다.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학살과 시민항쟁을 영상으로 담아 전 세계에 알린 언론인이다.

그는 독일 제1공영방송 일본 특파원으로 있던 1980년 5월20일, 신군부의 허락없이 광주에 들어와 공수부대의 잔인한 시민학살 만행을 카메라에 담아 영상을 독일에 송고했다. 다시 5월23일 광주로 돌아와 마지막 진압작전까지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광주를 알렸다.

그는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져 생사를 오갈때 '내가 죽게되면 5·18이 있었던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유족과 광주시는 '광주에 묻히고 싶다'던 유지를 받들어 고인의 머리카락과 손톱 일부를 분청사기함에 담아 옛 5·18묘역에 안치했다.

아놀드 피터슨(한국명 배태선)목사는 1975년부터 1981년까지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선교사로 활동을 했다.

역사학 교수이기도 했던 피터슨 목사는 1980년 5월 항쟁을 학자의 시각으로 기록, 학살과 헬기사격을 증언했다.

당시 미국정부는 헌틀리·피터슨 목사와 가족을 광주 공군기지로 피신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시민곁을 떠나지 않고 시민군과 함께 했다.


ju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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