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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희생된 초·중·고생들 재조명…16개교 18명

전남여상·숭의중고·대동고·송원여상·동성고 등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2018-05-16 14:08 송고
광주시교육청 교직원 30여명이 15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있다.(광주시교육청 제공)2018.5.16/뉴스1 © News1
광주시교육청 교직원 30여명이 15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있다.(광주시교육청 제공)2018.5.16/뉴스1 © News1

계엄군 성폭행 등 5·18참상과 관련한 새로운 증언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80년 5월 당시 희생된 청소년 희생자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16일 광주시교육청에 따르면 교육청이 파악하고 있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광주 학생들은 16개 학교 학생 18명이다.

첫 학생 희생자는 80년 5월20일 광주 동구 동명동 동문다리 인근에서 끌려간 동신중 3학년 박기현 학생이다.

계림동 책방에서 책을 사고 나오는 박기현 학생을 계엄군이 '데모꾼 연락병'으로 지목하며 진압봉으로 구타해 끌고 갔다. 그는 다음날 다발성 타박상으로 숨진 채 전남대병원에서 발견됐다.

계엄군의 집중사격이 있었던 21일에 특히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무등중 3학년 김완봉, 전남여상(당시 춘태여상) 3학년 박금희, 숭의중 2학년 박창권, 대동고 3학년 전영진, 동성고(당시 광주상고) 2학년 이성귀, 송원고 2학년 김기운 학생이 희생됐다. 사망원인은 전부 총상이다.
전남여상 박금희 학생은 헌혈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박금희 학생은 이날 희생자가 많이 나와 피가 부족해지자 오후 5시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기독교병원으로 가서 헌혈을 했다. 헌혈을 마치고 나오는 중 헬기 사격으로 요부와 복부를 관통당해 사망했다.

숭의중 박창권 학생은 도청 앞에서 '비상계엄령 철폐'를 외치다 우상박 총상으로, '엄마, 조국이 나를 불러요'라는 말을 남긴 대동고 전영진 학생은 노동청 앞에서 도청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조준 사격으로 우측 머리를 맞고 숨졌다.

무등중 김완봉 학생은 후경부와 좌전두부에 총상을, 동성고 이성귀 학생은 두개골 관통 총상을, 송원고 김기운 학생은 두부 총상을 입고 이날 모두 도청 인근에서 희생됐다.

김기운 학생은 22년 동안 무명열사로 시립공원 묘지 3묘역에 묻혀 있다가 2001년 10월 유전자 감식으로 가족을 찾았다.

22일에도 비극은 이어졌다. 시위에 참여해 오던 숭의고 1학년 양창근 학생이 공용버스터미널 앞에서 두부 관통 총상으로 사망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은 9일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을 기록한 영상을 공개했다. 이날 처음으로 공개된 영상은 80년 5월20일부터 6월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한 기록이다. 사진은 전남도청을 장악한 계엄군의 모습.(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영상 캡처)2018.5.9/뉴스1 © News1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은 9일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을 기록한 영상을 공개했다. 이날 처음으로 공개된 영상은 80년 5월20일부터 6월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한 기록이다. 사진은 전남도청을 장악한 계엄군의 모습.(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영상 캡처)2018.5.9/뉴스1 © News1

23일엔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송원여상 3학년 박현숙 학생과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 3학년 황호걸 학생이 각각 두부, 흉부, 하복부 전신 총상과 복부, 하지 총상으로 숨졌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방통고에 진학했던 황호걸 학생은 도청 지하실에서 시신에 묻은 피와 오물을 닦아주다 관이 부족해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가다가 매복해 있던 군인들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황호걸 학생은 구한말 의병대장 황병학 선생의 손자이기도 하다.

박현숙 학생은 같이 관을 구하러 이동하다 총 7발을 맞고 "물, 물, 물"이라고 말하다 숨졌다. 생존자 홍금숙씨 증언이다. 박현숙 학생은 당시 집에 쌀이 떨어져 동생에게 밥을 해주지 못해 안쓰러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24일엔 진월동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전남중 1학년 방광범 학생이 두부 총상으로, 마을 동산에서 고무신을 주우러 돌아서던 효덕초 4학년 전재수 학생이 흉부 관통과 후대퇴부 총상으로 사망했다. 당시 인근에 11특전 여단, 7특전 여단과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이동 중이었다.

같은 날 살레시오고 2학년 김평용 학생은 남구 송암동에서 좌우측 관절부 총상으로, 조대부고 3학년 김부열 학생은 지원동 부엉산에서 다발성 총상과 흉부 상단부 절단으로 사망했다. 당시 101사격장에 암매장 됐던 김평용 학생을 부모님과 담임교사, 시청 직원이 함께 찾아냈다.

총을 들고 계엄군과 싸우다 사망한 김부열 학생의 시신은 목이 잘리고 가슴도 없고 팔도 없었다. 유가족들은 사타구니 점으로 시신을 확인했다. 김부열 학생은 폭도로 분류돼 유가족들에게 지급되던 위로금 400만원도 받을 수 없었다.

27일 최후 항쟁의 날. 서광여중 3학년 김명숙 학생, 동성고 1학년 문재학 학생과 안종필 학생, 조대부고 3학년 박성용 학생이 희생됐다.

김명숙 학생은 27일 저녁 친구집에 가다가 전남대 용봉천 주변에서 좌측골반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당시 군홧발로 김명숙 학생 집에 들어온 군인들은 "엉덩이에 맞았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성고 문재학 학생은 도청에서 최후 항쟁을 하다 좌복부와 좌전경부 관통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문재학 학생은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 번호 94번으로 당시 전남일보 사망자 명단에 실렸다.

안종필 학생은 도청에서 27일 새벽 2시경 우흉부 관통 총상으로 끝내 쓰러졌다. 유품으로 며칠 전 맞춘 교복 영수증과 돈 500원을 남겼다.

박성용 학생은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부상자와 시신들을 돌보다 흉부 총상으로 희생됐다. "광주공원에 친구가 갔는데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며 자취하는 친구를 걱정하다 26일 나간 박성용 학생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광주시교육청 관계자는 "당시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단순 피해자나 희생자가 아니었다"며 "민주화 시위 도중 도청 방향으로 시위하다 총격으로 사망하거나 시민들을 구하러 헌혈하고 나오다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nofatej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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