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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스물세살 대학생의 꿈…출소전날 수사관이 성폭행

5·18 민주유공자 김선옥씨, 38년 만에 사연 공개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2018-05-08 11:13 송고 | 2018-05-08 12:05 최종수정
10일부터 광주 서구 치평동 자유공원 안에서 5·18기념문화센터 주최로 열리는 5·18영창특별전 중 열 번째 '진실의 방'에 걸린 '무너진 스물세살의 꿈' 사연. 한 쪽 벽면에 꽃 위로 노란 날비가 날아오르는 그림 위로 김선옥씨의 사연이 담겨있다.(5.18기념문화센터 제공)2018.5.8/뉴스1 © News1 박준배 기자
10일부터 광주 서구 치평동 자유공원 안에서 5·18기념문화센터 주최로 열리는 5·18영창특별전 중 열 번째 '진실의 방'에 걸린 '무너진 스물세살의 꿈' 사연. 한 쪽 벽면에 꽃 위로 노란 날비가 날아오르는 그림 위로 김선옥씨의 사연이 담겨있다.(5.18기념문화센터 제공)2018.5.8/뉴스1 © News1 박준배 기자

"나는 그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어요. 스물세 살 나를 그 수사관이 짓밟고 나서…"

5·18 민주유공자 김선옥씨(60)가 숨기고 싶은,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둔 사연을 털어놓았다. 

1980년 5월, 김씨는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다. 5월22일 오페라 해설집을 사려고 광주 금남로 인근 서점에 나갔다가 그의 인생은 뒤바뀌었다.

명노근 전남대 교수가 "학생들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자"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김씨는 대학생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도청에 합류했다.

그는 옛 전남도청 민원실에 마련된 상황실에서 차량통행증과 유류보급증, 외신기자 출입증, 야간통행증 등을 발급하는 일을 맡았다.

5.18 기간 총에 맞아 처참하게 죽은 시신을 보고 '아, 이것이 전쟁이구나. 시민에게 총을 쏘는 공수에 맞서 우리가 광주를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계엄군이 광주 무력진압을 시작한 5월27일 마지막 밤. 그는 어린 여학생들을 먼저 내보내고 계엄군이 진입하기 직전 새벽 3시경 도청을 빠져나왔다. 무섭고 두려웠다.

한달동안 피신생활을 하던 김씨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창평중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다가 80년 7월3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대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3일 동안 구타와 잠안재우기 등 고문수사를 받다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이감돼 하루종일 무릎꿇고 지내야 하는 힘든 영창생활을 했다.

폭행과 고문으로 점철된 조사가 끝날 무렵인 9월4일,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수사관이 김씨를 차에 태우고 밖으로 나갔다. 수사관은 비빔밥 한 그릇을 사먹인 후 여관으로 데려가 김씨를 성폭행했다.

"그 전에 죽도록 두들겨맞았던 일보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비참했어요."

김씨는 다음 날인 9월5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구금된 지 65일만이었다. 

김씨의 삶은 그 사건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 딸이 5·18에 연루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어머니(당시 51세)는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까지 외압 때문에 퇴직하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씨는 극심한 무력감과 치욕 때문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항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김선옥씨가 38년 전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한겨레신문 제공)2018.5.8/뉴스1 © News1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항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김선옥씨가 38년 전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한겨레신문 제공)2018.5.8/뉴스1 © News1 

교육청에 진정서를 내 83년 3월 '5·18을 들먹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음악 교사 발령이 났다.

이후 김씨는 30년 넘게 숨죽이며 살아왔다. 김씨는 지금도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며 산다. 머리가 반쪽 날아간 시신이 바닥에서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2001년엔 암에 걸려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그 즈음 대학 후배에게서 5·18보상 얘기를 듣고 후배가 가져온 5·18민주유공자 보상 신청서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내 인생을 보상한다고요? 얼마를 주실 건데요? 무엇으로, 어떻게 내 인생을 보상하려고요? 뭘?'

보상금으로 2000만원을 받았다. 허망했다. 김씨는 2011년엔 학교를 그만 두고 처음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눈물을 쏟았다.

"돌이켜보면 너무도 힘든 삶이었어요. 하지만 당시 우리 모두가 용감했고 훌륭한 선택을 했다는 자긍심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어요."  

김씨의 사연은 10일부터 광주 서구 치평동 자유공원 안에서 5·18기념문화센터 주최로 열리는 5·18영창특별전에 공개된다.

23개의 광주 상흔을 담은 방 중 열 번째 '진실의 방'에 '무너진 스물세살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드러낸다. 이 방에는 한 쪽 벽면에 꽃 위로 노란 날비가 날아오르는 그림 위로 김씨의 사연이 담겨있다.  

꽃과 노랑나비는 피해여성이 겪어왔던 고통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세상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함께 흐르는 음악은 김씨와 같은 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 작곡가 김현옥씨가 작곡한 곡으로, 가슴아픈 심정을 담아 헌정한 노래 '평화의 소녀상'이다.

임종수 5·18기념문화센터 소장은 "너무 아프고 힘들게 공개하는 이야기"라며 "이 글을 밝히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피해여성도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이어 "하지만 전쟁처럼 참혹한 상황에서 여성으로서 겪은 뼈아픈 고통을, 무거운 짐을 평생 혼자 짊어지게 하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피해여성의 동의를 얻어 10번방 '진실의 방'에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nofatej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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