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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김여정의 등장

(서울=뉴스1) | 2018-02-14 10:40 송고 | 2018-02-18 21:39 최종수정
뉴스1 © News1
조금은 먼발치에서 오빠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김정일 사후 언론에 보도된 김여정의 이미지는 건물 기둥 뒤에서 장난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오빠를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소녀의 인상이었다. 김여정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그녀가 만만한 존재가 아니란 걸 짐작하게는 됐지만 말이다.

김여정은 작년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됐다. 공산당 권력의 상위 서열에 진입했지만 남한 사람들에게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그를 우리의 관심대상으로 올려놓은 계기는 평창 동계올림픽이다. 평창올림픽은 그에게 남한 데뷔의 화려한 무대가 됐다. 어쩌면 김여정의 국제 무대 진출의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북한 최고권력자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으로서 귀빈 대접을 받으면서 서울 땅을 밟았지만 청와대를 방문하면서 ‘김정은 특사’로 변신했다.  

서울을 방문한 김여정이 TV화면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인 첫인상은 고개를 바짝 치켜 올리고 있는 도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긴장된 표정으로 평창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보고 난 이튿날 청와대를 방문한 그는 중요한 미션을 갖고 나타난 세련된 비즈니스 협상가 스타일로 바뀌었다. 살짝 미소를 머금기도 했지만 그의 표정은 냉정해 보였다.  

실제로 청와대에서 그는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극적으로 알렸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양을 방문해 달라는 김 위원장의 초청 의사와 함께 친서를 전달함으로써 이를 명확히 입증했다. 김여정의 서울 체류 2박3일은 극적 효과를 발휘했다. 김정은이 그걸 노렸다면 성공적이다.

북한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암울한 인상과는 달리, 김여정의 꼿꼿하면서도 어둡지 않은 표정은 김정은의 인상으로 북한을 판단해왔던 사람들의 마음을 상당히 흔들어 놓은 게 사실이 아닐까. 얼마 전까지 잔인하게 친인척을 처단했던 김정은 체제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발휘한 게 아닐까 싶다.

김여정은 어떤 지적 능력과 정치적 세계관을 갖고 있을까. 사회주의 국가의 주조된 이념에 충실한 사람일까, 혹은 단순히 3대 세습 권력 체제의 생리에 익숙한 사람일까. 대남관계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김여정이 어떤 성품과 생각을 가졌는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아마 김여정에 대한 정보는 정부가 상당히 갖고 있을 것이다.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다.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즈음에 태어났고, 오빠 김정은과 함께 어릴 적 몇 년간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 살며 보고 느꼈던 게 일반 북한 사람들과는 사고방식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그 외에는 이번 서울방문으로 우리에게 준 인상뿐이다.

서울서 2박3일을 보내고 평양으로 돌아간 김여정과 북한대표단 일행이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북한 노동신문에 실렸다. 김정은과 김여정이 이렇게 공식적으로 함께 찍은 사진은 없었다고 한다. 사진이 주는 시사점이 커 보였다. 김여정이 오빠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섰고, 김정은이 김영남 대표단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손을 잡은 모습이었다. 김여정이 북한권력의 중심축으로 한 발짝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것을 보면 김정은이 김영남과 김여정으로부터 각각 방남결과를 보고 받았다. 중앙통신은 “(김여정이)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남측 고위 인사들과의 접촉 정형(상황), 이번 활동 기간에 파악한 남측의 의중과 미국 측의 동향을 최고영도자 동지께 자상히 보고드렸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향후 적극적인 대남정책을 구사하겠다는 암시를 하는 말을 보도했다. 김정은은 “(남측이) 우리 측 성원들의 방문을 각별히 중시하고 편의와 활동을 잘 보장하기 위해 온갖 성의를 다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북과 남의 강렬한 열망과 공통된 의지가 안아온 화해와 대화의 좋은 분위기를 더욱 승화시켜 훌륭한 결과들을 계속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여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보고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인상을 어떻게든 평가했을 것이다. 어쨌든 보도문 중에 “남측의 의도와 미국의 동향을 최고영도자에게 보고드렸다”는 구절은 가볍게만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는 물론 미국 측에도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북한과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하다. 펜스 부통령 등 미국 정부의 고위 인사들도 마뜩지는 않은 것 같으나 협상을 입에 올리고 있다. 평창올림픽 평화 분위기를 대놓고 거스르지 못하는 눈치 같기도 하다.

핵문제가 터진 지 25년 동안 북한은 위기의 순간마다 벼랑끝 전술로 버텨왔다. 올림픽이 끝나면 북한의 핵미사일 이슈는 협상이나 대결의 선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은 이번에는 남북협상으로 이 위기의 물꼬를 돌리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여정은 서울 방문을 통해 청와대의 가장 귀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10시간 이상 여러 장소를 옮겨가며 가장 오래 접촉한 북한 사람이다. 총리, 청와대비서실장, 국정원장, 통일부장관 등 대한민국의 정부요인들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 언론은 그녀를 트럼프 이방카에 비유했다. 김여정이 올림픽기간 중에 쌓은 이미지를 토대로 다시 대남 평화공세 무대에 나설지도 모른다.

올림픽 성화는 오늘도 타오르고, 스키와 스케이트와 스노보드 위에 몸을 실은 올림픽 선수들은 더욱 높이 치솟고 더욱 빨리 미끄러지며, 더욱 우아하게 몸을 비틀 것이다. 이제 평창 동계 올림픽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마음 졸이며 갈망했던 ‘평화올림픽’을 즐기고 있다. 설 휴일을 맞아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TV화면에서 쏟아지는 기록과 기량을 보며 환호할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곧 꺼질 것이다. 그러면 잠시 찾아왔던 올림픽 평화도 흔들릴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게 될까. <뉴스1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