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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일의 맥] 곁에 있는 영웅 차범근은 후반전을 뛰고 있다

(서울=뉴스1) 임성일 기자 | 2017-10-17 16:09 송고
'차붐' 차범근이 축구인 출신 최초로 '스포츠영웅'에 선정됐다. 그가 영웅인 이유는, 분데스리가에서의 10년이 아니라 이후 30년 때문이다. © News1
'차붐' 차범근이 축구인 출신 최초로 '스포츠영웅'에 선정됐다. 그가 영웅인 이유는, 분데스리가에서의 10년이 아니라 이후 30년 때문이다. © News1

"토요일이 다가올 때마다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웠다. 그렇게 분데스리가에서 10년을 보냈다. 나만 아는 마음속의 '공포'가 있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공을 접하지 못한 것에서 출발한, 기본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차붐' 차범근 전 축구대표팀 감독(64)이 한국 축구계의 영웅을 넘어 한국 스포츠계의 전설로 아로새겨졌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16일 '2017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차범근 전 감독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차 감독은 고 손기정(육상)을 비롯해 고 김성집(역도), 고 서윤복(육상), 고 민관식(행정), 장창선(레슬링), 양정모(레슬링). 박신자(농구), 고 김운용(행정), 김연아(피겨)에 이어 한국 스포츠사를 빛낸 영웅으로 공인됐다. 어떤 상 때문에 더 빛나고 덜 빛날 그릇은 아니나 응당 받아야할 인물이 더 늦기 전에 상응하는 가치를 인정받은 이정표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축구의 살아 있는 레전드다. 아시아 내에서나 골목대장이었지 철저하게 세계 축구계의 변방이던 1970~1980년대, 차범근은 당대 축구계의 중심이었던 분데스리가에서도 최고의 '용병'으로 명성을 떨쳤다. 우리 선수에게도 가능할까 싶었던 빅리그 진출을 일군 게 1978년이었다. 화려하게 마무리한 시점은 1989년이었다.

통산 분데스리가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넣었으니 대략 3경기 당 하나씩은 골을 잡아낸 셈이다. PK는 없었다. 오로지 필드 골로만 만들어낸 근 100골이다. 정상을 질주했던 10년 동안 옐로카드가 딱 하나 뿐일 정도로 잘하면서 깨끗한 선수였다. 지금의 UEFA 챔피언스리그의 위상을 지녔던 UEFA컵(현 유로파리그)을 2번(프랑크푸르트/1979-1980, 레버쿠젠/1987-1988)이나 들어 올렸으니 스타성까지 갖춘 슈퍼스타였다.
그랬던 그가 10년 내내 '공포에 떨었다'니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2017피파20세월드컵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지난 봄 마주한 차범근 전 감독은 "나는 나만이 아닌 고통 속에서 10년을 보냈다. 아시아에서는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세계에는 나보다 잘하는 선수들이 널려 있었다"면서 "착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축구를 잘할까, 연모하게 되는 선수들이 부지기수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축구는 나에게 전부이자 희망이었다. 그런데 나만큼 잘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으니 두려움을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됐다. 내가 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절실함이 달랐기 때문이다. 요즘 선수들은 즐기면서 한다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축구를 했다"고 전했다.
슈퍼스타 차범근이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진행했던 것이 차범근 축구교실 운영과 차범근 축구상 제정이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 News1
슈퍼스타 차범근이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진행했던 것이 차범근 축구교실 운영과 차범근 축구상 제정이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 News1

자신은 그렇게 이겨냈다. 하지만 후배들은 그 고통스러운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또 새롭게 간절하다. 내일의 차범근들은 자신이 겪은 콤플렉스를 가져서는 안 되고, 그것이 궁극적인 한국 축구발전의 '정도'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차 감독은 은퇴 후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차범근 축구교실'을 열어 꿈나무들을 육성했고 '차범근 축구상'을 제정해 될 성 부른 떡잎들에게 물과 거름을 주고 있다.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일이다. 내년이면 차범근 축구상이 30주년을 맞는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라는 표현은 참이다.

얼추 강산이 3번 변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 축구는 차범근 감독이 아파했던 30년 전 그 모습 그대로다. 눈앞의 결과에 목말라 때마다 '일단 이번은 이렇게 넘어가자'를 반복했으니 발전은커녕 제자리걸음도 힘들었다.

차 감독은 독일 진출 무렵을 떠올리며 "일본 축구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20~30년 뒤에는 일본이 우리를 뛰어 넘을 것 같았다. 나도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지만, 그냥 지켜볼 수는 없었다"고 회상했다. 은퇴 후 후진양성을 최우선 수행과제로 삼은 것 역시 같은 패턴으로는 도태를 피할 수 없다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까닭이다.

안타깝게도 차 감독의 우려는 30년 뒤 현실이 됐다. 2017년 10월 한국의 FIFA 랭킹은 62위다. 일본은 44위고 우리가 신경도 쓰지 않던 중국이 57위다. FIFA 랭킹이 그 나라 축구 수준을 완전히 설명하는 지표는 아니겠으나 딱히 변명하기도 머쓱한 위치다. 행동했던 이들이 더 많았다면 이렇게 추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축구인 차범근이 귀감이 되는 이유는 분데스리가에서의 10년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 30년 때문이다. © News1
축구인 차범근이 귀감이 되는 이유는 분데스리가에서의 10년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 30년 때문이다. © News1

축구인 차범근이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박수 받아야하는 이유는 분데스리가에서의 10년 때문이 아니라 이후 한국에서의 30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조언하는 것은 쉽다. 세상 태평한 것이 위에서 팔짱끼고 훈수 두는 것이다. 모두가 전문가를 자처하며 장기 로드맵을 그리라 말할 때 차 감독은 묵묵히 실천했다. 차범근 축구상이 제정된 것이 1988년이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불과했다. 어른이 된 현재의 모습도 귀감이다.

누군가 '미스터 쓴소리' '독설가'라는 그럴듯한 수식어 뒤에서 대표팀을 향해 신나게 비수를 던질 때 차 감독은 "이럴 때는 모두가 말을 좀 아끼고 그냥 지켜봐 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차가운 소리보다는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속으로 함께 아파하고 있다. 대표팀 이야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깊은 한숨을 쉬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고픈 말을 안으로 삼키고 있다. 애정이 없어서, 비겁해서 지적을 안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판과 비난을 넘어 빈정과 조롱이 난무하는 축구판이다. 악담과 저주도 서슴지 않는다. 일반 팬은 물론 축구인들도 온통 두세 발 물러나서 '탓 시리즈'에 바쁘다. 하지만 정작 같이 뛰면서 아픔이든 고통이든 나누는 이들은 적다. 한 나라의 축구 수준은 대표선수들의 경기력뿐만이 아니라 그 나라 축구판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합인데도 "우리는 잘하고 있는데 너희 때문에 그래"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여름까지 한국에서 열리는 U-20 월드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차범근 감독은 최근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한 축구 꿈나무들과 함께 독일을 찾아 아이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가 한국으로 들어오면 역시 축구 유망주들과 함께 봉송할 계획이다.

동떨어진 영웅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곁에 있는 스포츠영웅 차범근은 지금 후반전을 뛰고 있다.


lastuncl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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