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인터뷰]명창 안숙선 "소리 인생 60년…득음 아직 멀었다"

(서울=뉴스1) 박정환 기자 | 2017-06-18 10:58 송고
안숙선 명창 © News1
안숙선 명창 © News1

소리꾼의 길은 멀고 험하다. 엄하고 가혹할 정도의 자기관리와 피나는 훈련은 필수다. 작고한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똥물을 먹고 소리를 얻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안숙선(69) 명창은 9세부터 소리를 시작해 이 길을 60년간 걸어 왔다. 올해 '국악 인생 60주년'을 맞은 것이다. 안 명창은 지난 16일 전북 남원시 운봉마을에서 기자와 만나 "이곳은 판소리 동편제의 기틀을 세운 조선 말기의 명창 송흥록(1801~1863)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며 "득음한 스승들에 비하면 아직 내 소리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다.
안 명창의 고향도 남원이다. 운봉마을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떨어진 산동면 대상리 웃점마을이다. 안재관·강복순씨의 딸로 태어는 그는 "삯바느질로 5남매를 어엿하게 장성시킨 어머니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라고 했다.

인생을 배운 어머니 말고도 여러 스승이 있었다. 안 명창은 19세에 만정(晩汀) 김소희 명창 문하에서 소리를, 향사(香史) 박귀희 명창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과 가야금 산조를 각각 사사했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1986년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했고, 에든버러 축제를 비롯해 세계적인 무대에서 판소리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는 200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해 2013년 퇴임 때까지 역량 있는 전통예인들을 양성했다. 또, 국립창극단 단장,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을 맡아 국악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그는 2015년부터 매년 첼리스트 정명화와 함께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에 참여해 국악 영재를 가르치고 있다.
◇걸핏하면 교무실에서 노래했던 9살 아이

안숙선 명창이 소리를 하게 된 것은 집안의 영향이 컸다. 대금산조 인간문화재 강백천,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 가야금 명인 강석춘이 모두 그의 외삼촌이다. 가야금 명인 강순영은 막내 이모이며 일본 강점기에 이름을 떨친 가야금 명인 강태홍도 친척뻘 된다. 안숙선 명창의 남다른 예술성은 이러한 집안 내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 명창은 집안 사정으로 인해 남원시 천거동 소재 이모 집에 살면서 국악을 처음 접하게 됐다. 그는 "남원초등학교 다니던 9살 때 주광덕 선생께 처음 소리를 배웠다"며 "이모가 학생을 모아 집에서 소리와 가야금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끼어들었다"고 했다.

다만, 그가 너무 어릴 때부터 남원 바닥에서 '소리(판소리) 잘하고 재주 있다'는 얘기를 듣다 보니 원치 않아도 여기저기 불려 나가야 했다. "걸핏하면 선생님께 교무실로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어요.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이런 일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어요."

아버지 안재관 씨가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 강옥순 씨가 삯바느질로 꾸려가는 생계가 여유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소리꾼의 길로 나서야 했다. "어린 마음에 다른 애들이 다 학교에 다니는데 혼자 중도에 그만두게 된 것이 창피하고 속상했습니다. 담임과 아이들이 집으로 찾아와 중학교까지만이라도 마치라고 권유했지만 괜스레 쌀쌀하게 대했어요."

12~18세 때 남원 국악원에 소속된 안숙선 명창은 동편제 명창 중 하나인 강도근을 사사했다. "적벽가의 활 쏘고 불 지르는 장면, 춘향가의 이별 장면, 심청전의 밥 빌러 나가는 장면들을 이때 7년 동안 깨쳤습니다. 강 선생의 장기인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를 배우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좋은 수련이 됐어요. 여자 같지 않게 목소리 힘이 좋다는 평을 듣는데에는 강 선생님께 배운 동편제 판소리의 가르침이 컸습니다."

안 명창은 "실력이 늘었지만 계속 소리를 할 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남원은 예향(藝鄕)이라고는 하지만 보수적인 곳"이라며 "국악원에서 배운 민요를 읊조려도 '거 몹쓸 가시내'라는 말을 듣기 일쑤"라고 했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 탓에) 칭찬을 받으며 소리를 배웠지만 계속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고도 했다.

◇'평생의 스승' 김소희와 박귀희 그리고 50년 뒷바라지 남편

안숙선 명창은 평생의 스승으로 김소희 선생(1917∼1995)과 박귀희 선생(1921~1993)을 꼽았다. 안 명창은 "자기 일생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진다"며 "모든 면에서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또 지팡이 역할을 해주셨기에 두 분 선생님을 빼면 내 음악 인생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어 "아마도 두 분 선생님이 아니셨으면 지금쯤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덧붙였다.

19살 때였다. 당대의 국창(國唱) 김소희 선생이 "서울로 오너라. 잠깐 좀 보자"고 안 명창에게 전화했다. "만정 선생은 소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감생심 곁에 갈 수도 없는 존재로 생각되는 분이었습니다. 전북 남원에서부터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지요."

동생 안옥선과 함께 상경한 그는 종로구 묘동에서 자취하며 만정 선생에게서 춘향가·흥부가 등을 배웠다. "흥보가부터 공부를 시작해 창극 춘향전도 배웠습니다. 이때만 해도 판소리가 지금처럼 많이 불리지 않아서 소리하는 사람들은 민요를 한마디 하거나 가야금을 타면서 소리 한 대목을 얹는 등 맛만 보여주는 식이었습니다."

안숙선 명창은 만정 선생의 권유로 향사 박귀희 선생을 만나 2년 만에 가야금 병창의 후계자가 된다. "향사 선생께서 나를 귀엽게 여겨서 선배들을 제치고 1973년에 가야금을 타면서 판소리나 단가를 부르는 연주법인 병창 전수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때 내게는 두 분 선생님께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향사와 만정은 싹수가 보이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던 안 명창을 이곳저곳 무대에 세워주고, 해외를 갈 때는 꼭 데리고 다니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 애썼다. 그렇다고 마냥 예뻐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시간 약속을 어기면 향사 선생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주의를 받았다. 그는 "만정 선생이 누군가를 '인간성이 못돼먹었는데 예술 잘하면 뭐하냐'고 야단친 적이 있다"며 "아직도 이 말을 새기고 살고 있다"고 했다.

이들 스승은 안 명창이 1974년 결혼한 뒤에도 소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그의 남편 최상호씨에게 끊임없이 '세뇌 교육'하기도 했다.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남편 최씨는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안 명창이 15살 시절부터 든든한 뒷바라지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 부부는 첫사랑이 결실을 본 경우다. "이 사람(남편)이 진주 개천예술제 공연에 출연한 15살인 저를 우연히 보고 편지를 쓴 것이 계기였어요. 서울에 올라와 한참 고생하다가 1974년에 혼인했습니다."

안 명창은 남편에 대해 "어쩌다 주먹만 한 '방자꼬마'를 사랑하게 돼 평생을 소리꾼 뒷바라지로 마음고생 했다"라며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2남 1녀를 뒀으며 딸 영훈씨는 현재 거문고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소희 명창(왼쪽) 안숙선 명창  © News1
김소희 명창(왼쪽) 안숙선 명창  © News1

◇국립창극단 입단과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안숙선은 서른 살인 1979년 국립극장 창극단에 입단했다. 오디션에서 판소리 '춘향가' 중 '갈까부다' 대목을 불렀다. 심사위원들이 “저런 유능한 사람이 여태껏 안 들어오고 뭐 했느냐”고 했다는 후문이지만 안 명창의 소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창극단 여러 선생님 밑에서 실컷 공부하면서 비로소 '소리가 내 길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서 "재주가 있다는 평을 들으며 선생님들의 분에 넘치는 귀여움을 받으면서 지냈지만, 스스로 철들어 한 공부는 아니었다"며 "그런데 창극단에서는 하루라도 소리를 안 하면 좀이 쑤시고 그럴 정도로 소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1980년대 국립창극단에는 개인 연습실이 없었습니다. 복도든 어디든 사람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연습을 했어요. 다 퇴근하고 난 뒤 지하 보일러실에서 연습했는데, 판소리가 멀리서 들으면 귀신이 흐느끼는 소리 같잖아요. 머리도 앞으로 내려오고. 수위 아저씨가 깜짝 놀라서 누구냐고 묻기도 했죠.(웃음) 소리에 미치다시피 했어요. 그렇지만 혼자서는 하기 힘든 것 같아요. 김동준, 김득수 선생님 등 소리 좋아하시는 고수님들이 많았는데 잘한다고 해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더 하라고 하시기도 했죠. 그 덕분에 소리 공부를 좀 했죠.”

안숙선 명창은 37세인 1986년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完唱)을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했다. 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수궁가 등 한바탕에 보통 5∼6시간이 걸리는 공연이니 25시간이 넘도록 소리를 한 셈이다.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완창한다고 해도 잘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말이 완창이지, 완창을 하기 위해 쏟는 힘과 노력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요. 판소리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 역할은 물론이고 상황 설명에 개짖는 소리까지 혼자서 다 해내야만 하죠. 완창하고 나서 나는 1주일간 심한 몸살을 앓았어요. 며칠을 자리에 누워있으면서 처음으로 '소리를 네몸처럼 중히 여겨라'고 하시던 스승의 가르침을 절감했어요."

이런 그의 소리는 1993년 영화 '서편제'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임권택 감독이 소설가 이청준의 연작 단편소설 '남도사람' 일부를 영화로 옮겼다. 작품에서 가장 명장면은 소경이 된 소리광대 소녀가 혈혈단신 떠돌다 그녀의 유일한 고수였던 동생과 해후하는 대목이었다. 이때 배우 오정해가 부르는 ‘심봉사 눈뜨는 대목’(심청가 중)이 실제로는 안숙선 명창의 소리였다.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쥐라기 공원'에 이어 흥행 성적 2위를 기록한 이 영화는 국악이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깨는데 크게 기여했다.

1997년 안숙선 명창은 40대 젊은 나이에 인간문화재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지정된 것에 대해 국악계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같은 해 국립창극단 단장으로도 임명됐다.

다섯마당을 완창하자 소리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위기의식이 들었다. 그는 "기초 삼아 배울 것은 다 배웠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느냐 마느냐는 위기의식이 생겼다"며 "소리란 막 떠벌리는 것이 아니고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이 마흔 살에야 생겼다"고 했다.

"소리는 목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죠. 약탕기에서 한약을 짜내듯 손끝, 발끝에서까지 에너지를 발산해야죠. 득음은 단순히 소리를 잘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를 통해 인생사를 깨닫는 것이죠. 사실 자신의 소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아요."

◇ 소리 공부는 '평생 수련'

안숙선 명창은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를 비롯해 다양한 공연을 통해 국악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어머니 강복순 여사, 만정 김소희, 향사 박귀희 밑에서 성장했던 안 명창에게도 제자들이 많이 생겼다. 특히, 2000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안 명창은 "내가 특별히 가르치는 것도 없다. 제자들과 함께 신명 나게 장구 치며 소리 연습을 할 때가 참으로 행복했다"며 "죽는날까지 노력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창극단 유수정 단원을 비롯해 제자들은 굉장히 차분하면서 굉장히 또박또박 아주 정확하게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긴장감이 들게 공부를 가르친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소리 인생 60주년을 맞았지만 "지금은 내 소리에 더 만족하지 못 한다"며 "소리 공부는 '평생 수련'"이라고 했다. "더 역동적으로 소리를 냈으면 하는 마음이죠. 소리 공부를 하루 너덧 시간씩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더 깊고 넓은 예술로서 승화할 수가 없거든요. 제가 노래를 하지 않고서는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죠. 그래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것은 건강입니다".

소리에는 삶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별도, 슬픔도, 사랑도, 기쁨도 다 녹아있습니다. 이걸 표현하려면 (당대의) 문화도 알아야 하고, 소리도 좋아야 합니다. 어떻게 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느냐도 관건이죠."

안 명창은 끝으로 국악이 일반인에게 다가가려면 어린 시절부터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오는 7월 '명창 안숙선과 함께하는 판소리 마스터 클래스' 꿈나무 캠프를 이곳 남원 운봉마을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국악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안 명창은 "아이들에게 국악을 피아노 치듯이 가르칠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고 했다. 또 "일반적으로 국악을 접하기 힘들다. 국악도 그렇고 클래식도 그렇고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장르일수록 계속 들으면 금방 동화될 수 있다"고 했다.

"남원에 판소리기념관을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 남원은 동편제의 발상지거든요. 명창들도 많이 배출된 곳입니다. 그리고 힘이 다할 때까지 소리를 해야지요. 소리를 하다 죽는 게 꿈입니다."


art@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