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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 "박근혜 정권하에서 절필 잘했다. 왜냐면…"

[블랙리스트 그 후를 묻다 ③] 안도현 우석대 교수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7-03-14 09:16 송고 | 2017-11-28 15:57 최종수정
안도현 시인 © News1
안도현 시인 © News1


"박근혜 정부에서 시를 안쓰길 잘한 거 같아요. 그 울화를 어디 뽑아낼 데가 없어 그대로 시에 담았을 텐데 그럼 시에게 미안하잖아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인 안도현(56)시인은 최근 서울 망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지난 4년간의 절필을 끝낸데 대한 소감을 이같이 말했다. 그는 또 "시는 어차피 운명처럼 나와 함께 가는 것"이라면서 "1980년대 저항문학을 넘어서서 '정치적 메시지'와 '미학'이라는 둘을 잘 결합시킨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그 후를 묻다] 시리즈 기사

도종환 "이제 블랙리스트는 부정돼야만 한다"
①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임옥상 "블랙리스트 이후? 논공행상을 경계해야"
② 민중미술가 임옥상 화백

'反블랙리스트' 광화문 캠핑촌장 송경동 "시인은 혁명가"
④ 시인 송경동  

"무용계, 블랙리스트뿐만 아니라 비리 등 적폐 청산해야"
⑤ 현대무용가 정영두 두댄스시어터 대표

"'광화문 캠핑촌' 기록물로 남겨 학문적 연구해야 한다"
⑥ 이동연 문화연대 집행위원장 

◇시가 '운명'인 그가 4년간 시 안쓴 이유는…

'연어' 등의 동화, '너에게 묻는다' 등의 시로 잘 알려진 안 시인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면서도 작품성 높은 시를 꾸준히 시를 써온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던 그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안중근 의사의 유묵의 소장 경위나 도난 경위의 해명'을 촉구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당한 데 대한 항의로 당시 그는 '박근혜 정권하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스스로에게 내린 '금시령'(禁詩令)을 푼 것은 꼬박 4년이 흐른 지난해 12월이었다. 4년간의 재판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고 이어 박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시점이다. 

"1990년대 나온 '안중근숭모회'라는 단체의 도록에 안중근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의 소장자 이름이 박 대통령으로 올라있는데 정부 기관은 이 유묵를 '도난문화재'로 분류하고 있어서 진위를 밝혀달라고 올린 글이었어요."

안도현 시인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자신의 문제의 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그가 기소된 날은 공교롭게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국정원 댓글사건' 관련 혐의로 기소된 날이기도 했다. 안 시인은 검찰이 국민의 눈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물타기'로 자신을 기소했다고 믿었다. 

그가 '시를 다시 쓰겠다'고 밝히자 출판사 창비는 계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에 실을 시를 청탁했다. 하지만 안 시인은 시를 쓰는 데 실패했다. "끙끙댔는데 안써지더라고요.(웃음) 새로 몇 년만에 쓰는 거니 더 잘 쓰고 싶은 욕심도 없잖아 있었고, 굳어있는 손발도 아직 안풀린 거 같고…."

30년 넘게 시를 써오면서 메모는 늘 해온 그지만 지난 4년 동안은 메모도 하나 하지 않았고 시 읽기도 게을리했다. 하지만 그는 시를 놓칠까봐 불안해하지 않았다.

"시는 어차피 운명처럼 나와 함께 같이 가는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절필했다가 나중에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도 않았죠. 지금은 (시쓰기 위한) 충전이 필요한데 아직 발전기가 잘 안돌아가는 상태인 거라고 봐요."

안도현 시인/뉴스1 © News1
◇역사와 사회가 시인을 광장으로

안도현 시인은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의 작품에는 저항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시, 현실 속 부조리나 부당함에 대한 시도 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랑, 삶의 소박한 풍경을 담은 시들도 많았다. 그의 작품은 딱히 저항시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도현 시인은 2000년대 후반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자주 냈다. 한국의 역사와 정치가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며 살고 있었던 시인을 자꾸 광장으로, 광장으로 몰았던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왔던 세대가 우리 세대인데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 그것이 자꾸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글로든 실천적인 행동으로든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현대사의 사회·정치적 굴곡과 함께 30년이 넘는 그의 시력(詩歷) 역시 여러차례 변곡점을 맞았다. 독재정권의 서슬이 푸르던 1980년대 초반, 그는 문학과 정치, 사회가 어떻게 서로 만나고 부딪치고 스며드는 지를 내내 고민했다. 그러다 전국교직원노조 활동으로 1989년 근무하던 중학교에서 해직됐다. 복직투쟁 끝에 34살이 된 1994년 복직했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이를 반영해 1997년 출간한 시집 '그리운 여우'(창비)에는 목소리를 낮추고, 빨리가는 것보다 느린 것을 지향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역사의 바퀴가 뒤로 돌아가면서 그의 시적인 고민도 되돌아갔다. 이명박 대통령 정권부터 현재까지 그에게는 '어떻게 1980년대와는 다른 저항의 목소리를 시에 담느냐'가 과제다.

"1980년대처럼 '남북이 한민족이다', '통일을 가로막는 세력은 가라' 같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없을 때는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나 신동엽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모든 쇠붙이는 가라'가 큰 의미죠. 하지만 이미 남북이 교류하고 있는데 '우리는 만나야한다' 이렇게 시에서 쓰면 아무런 정서적 감흥이 없는 겁니다."

안 시인은 그래서 2012년 펴낸 시집 북항(문학동네)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로 '날선 분노'와 '시적인 성찰'을 결합시키는 것을 시도했다. 그는 "그런 방법적 고민을 해야 그전에 죽 써왔던 시에서 벗어나 발전하는 것"이라면서도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실패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는 없다"며 평가를 유보했다. 하지만 "정치성과 문학성의 결합이라는 방향으로의 시도를 계속할 것"이라면서 박근혜 시대 이후로도 '문학적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정치적 각성(계몽성)과 아름다움이라는 둘을 재료로 비빔밥을 어떻게 잘 만드냐가 중요히다고 봐요. 과거에 실천적 목소리를 내는 시들이 문학성이 부족하다고 비판받았는데 그것 역시 우리가 지나온 역사입니다. 나는 둘의 균형을 잘 잡아 보이지 않게 독자들을 각성시키고 감동을 주고 싶어요. 1980년대 저항문학을 넘어서서 또 다른 무엇을 만들고 싶어요."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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