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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2·28 학살 70주년…독립지지 수천명 시위(종합)

차이잉원 총통, 학살 진상 규명 약속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2017-02-28 22:26 송고
대만 2·28 사건 70주년을 맞은 28일(현지시간) 친독립 성향의 시민들이 수도 타이베이(臺北) 한복판에 있는 '중정(中正·장제스의 본명)기념당' 앞에서'대만 독립'이라고 적힌 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뉴스1
대만 2·28 사건 70주년을 맞은 28일(현지시간) 친독립 성향의 시민들이 수도 타이베이(臺北) 한복판에 있는 '중정(中正·장제스의 본명)기념당' 앞에서'대만 독립'이라고 적힌 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뉴스1

대만에서 2·28 사건 70주년을 맞은 28일(현지시간) 친(親)독립 성향의 시민 수천명이 정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국민당 군·경이 차별에 항거한 대만 주민들을 유혈 진입한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약속했다.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2·28 사건은 1947년 2월 27일 국민당 전매국 단속반원이 무허가로 담배를 팔던 노점상 여인을 구타한 것이 발단이 됐다. 단속에 항의하는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자 주민들의 봉기는 28일 대만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에 1945년 패망한 일제로부터 대만을 인수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대만의 요청에 2개 사단 병력을 보내 대만 주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1만8000~2만8000명이 희생됐다고 2·28사건 연구보고는 추산했다.

명(明)나라때부터 대만에 건너와 주거했던 중국계 후손인 본성인(本省人)과 광복 이후 중국에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 간 차별도 봉기가 격화된 이유 중 하나다. 외성인은 인구에서 채 20%가 안됐지만 기득권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장제스는 내전에 패한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 전 국가주석에 쫓겨 대만으로 넘어왔으며 1975년 타계할 때까지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만을 통치했다. 이로 인해 2·28 사건은 금기어가 됐다. 이후에도 오랫 동안 이 사건은 입에 올릴 수 없는 역사였다.
이날 시위대는 수도 타이베이(臺北) 한복판에 있는 '중정(中正·장제스의 본명)기념당'에 모여 "228 살인자를 쓰러뜨리자"며 입구에 계란을 투척하기도 했다. 일부는 "독재의 상징을 몰아내자"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당 입구로 향하다 장 전 총통의 지지자들과 충돌해 다치기도 했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이 28일(현지시간) 타이베이에서 열린 2·28 사건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있다. © AFP=뉴스1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이 28일(현지시간) 타이베이에서 열린 2·28 사건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있다. © AFP=뉴스1

시위대는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인 중정기념당에서 장 전 총통의 동상을 철거하길 원하고 있다. 대학생인 판 웬엔(19)은 "살인자인 장제스 전 총통을 숭배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000년 국민당 장기집권을 무너뜨린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시절 기념당은 '대만 민주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2008~2016) 전 총통이 이를 되돌려놓았다.

지난해 출범한 대만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정부는 지난주에 기념당의 용도 변경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또 기념당 내 장제스와 관련한 흔적도 지우고 있다. 하지만 대만 문화부는 장 전 총통의 동상은 철거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2·28 사건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가 학살 책임자들을 규명하는 작업을 추진하길 원하고 있다. 학살에서 부친을 잃은 린 리차이는 "여전히 많은 희생자들이 있지만 70년이 지나도 가해자는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날 차이 총통은 기념식 연설을 통해 사건을 조사할 수 있는 독립된 조직을 신설하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차이 총통은 "언제가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2.28사건은 1995년 국민당 소속의 리덩휘(李登辉) 당시 총통이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국가 차원의 배상을 약속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등의 작업은 마잉주 총통의 집권으로 거의 중단됐다.

한편 최근 들어 중국은 차이 총통이 '92컨센서스'(92공식·1992년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합의)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독립 성향의 행보를 보이는 것과 관련해 대만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주 중국의 대만사무를 총괄하는 국무원 대만판공실은 대만 독립 지지자들이 "갈등을 유발시키고 여론을 분열시키기 위해" 기념식을 조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중국 공산당은 당시 주민들의 봉기를 1949년 공산당 승리로 이어진 전체 투쟁의 일부로 보고 있다. 반면, 대만은 본성인의 동의 없이 대만을 통치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로 보고 있다.


allday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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