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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연루된 큐레이터, 함영준 말고도 많다"

"성폭력 전력 불구 여전히 국공립미술관서 일해"
문단 이어 미술계에서도 성폭력 파문 일파만파

(서울=뉴스1) 김아미 기자 | 2016-10-23 21:30 송고 | 2016-10-24 22:33 최종수정
#지난 6월 13일, 국내 비평 웹진 '크리틱-칼'에 한 유명 팝아티스트가 한 여성 무명작가에게 접근해 '전시 기회'를 미끼로 성관계를 요구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유명 팝아트 작가가 이 여성 작가에게 '인터넷에서 그림을 봤다. 함께 단체전에 참가해달라'며 접근했고, 이에 대한 댓가로 성관계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전시 기회를 얻기 힘들어 전전긍긍해 왔던 무명의 여성작가는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에 응했다'고 했다. 이 내용대로라면 배우, 가수 지망생들에게 '데뷔'를 미끼로 성상납을 요구하는 연예계 오랜 병폐가 미술계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 성추행 피해자들이 23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문단에서 성희롱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가 지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여성 작가 등에게 신체 접촉을 가했음을 시인하고, 이를 반성하고 사과하는 차원에서 모든 직위와 프로젝트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2016.10.23/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 성추행 피해자들이 23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문단에서 성희롱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가 지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여성 작가 등에게 신체 접촉을 가했음을 시인하고, 이를 반성하고 사과하는 차원에서 모든 직위와 프로젝트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2016.10.23/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문단에 이어 미술계까지 성폭력 논란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웹툰작가 이자혜에 이어 시인 박진성, 원로작가 박범신으로 이어진 SNS 상에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단 폭로가 급기야  '#미술계_내_성폭력'  '#예술계_내_성폭력'까지 옮겨붙는 양상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즉각 공개 사과에 나섰지만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터질 것이 터진 것"이라면서도 "일방적인 폭로전으로 마녀사냥이 돼서는 안 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결국 미술계까지…"어제 오늘 일 아니다"

지난 21일 인터넷 전자필기장 '에버노트'에 자신을 '예술대학에 다니며 작업을 하고 있는 21살 여자'라고 밝힌 K씨가 지난해 11~12월 일민미술관 큐레이터인 함영준 씨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고 폭로하고 나섰다.

이어 한 트위터 이용자가 22일 "함 큐레이터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며 "사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그런 쪽(성추행)으로 더러웠고 유명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함 씨는 '에버노트'에 즉각 사과문을 올렸다. "과거 여성작가에게 신체 접촉이 이뤄진 부분이 대해 깊이 사죄하고 후회한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제가 가진 모든 직위를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함 씨가 활동하던 비정기 문화잡지 '도미노' 동인과 그래픽디자이너 그룹인 '워크룸프레스' 등도 그의 불미스러운 행동에 대해 사과문을 게재하고 함 씨와 결별을 선언했다. 

즉각적인 공개 사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계속됐다. 함 씨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23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단체 항위시위를 펼쳤다. 일부에서는 "사과가 아닌 처벌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함 씨는 "24일 추가 입장을 정리해서 다시 발표하겠다"고 본지에 밝혔다.

미술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이미 미술계 내에서도 공론화되지 않은 성희롱, 성추행을 포함한 성폭력 사례들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국내 한 사립미술관 관장까지 이러한 논란에 휩싸여 결국 SNS 상에서 공개 사과를 하기도 했다.

미술계 인사들은 함 씨 이외에도 과거 성폭력에 연루됐던 큐레이터들이 제대로 된 처벌이나 사과, 피해 보상절차 없이 여전히 국·공립·사립미술관이나 정부 산하 예술기관의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더 큰 문제로 지적했다.

미술관 한 큐레이터는 23일 페이스북에 "일민 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공공기관에 일했던 몇몇 큐레이터가 (성추문에) 관련돼 있다"며 "가해자들은 국립과 시립이 운영하는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적었다.  

◇과거 성폭력 사건, 왜 이제서야 폭로전으로?

미술계 성폭력이 많은 이유는 스승과 제자 간, 큐레이터와 작가 간 관계가 원천적으로 '갑을관계'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미술계의 경우, 제자는 스승에게 배우고 그 스승을 통해 미술판으로 나갈 수 있게 되고, 작가는 큐레이터를 통해 작품 전시 기회를 얻을 수 있는데, 그들과 관계가 틀어지면 향후 미술계에서 일하기가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함 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K씨 역시 함 씨가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K씨는 "휴학중인 어린 학부생이 유명 큐레이터에게 작업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술계 한 인사는 "일방적인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도 앞으로도 계속 같은 바닥에서 인연을 이어가야 한다는 점 때문에 참고 넘겨버리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크리티-칼' 발행인이자 독립 큐레이터인 홍태림 씨는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K씨 사건을 언급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일들은 이보다 더한 것도 있을 것"이라며 "그때 그때 벌어지는 성추행, 성폭행 문화를 꺾어버리고 싶지만 피해자인 당사자들이 그런 단계까지 일이 진행돼 자신이 공공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왔기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갑을관계' 내에서 일방적으로 성폭력을 당했을 경우,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는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는 분석이다. 미술계 내 과거 성폭력 사건들이 문단 내 성폭력이 이슈화한 것을 계기로 지금에서야 급격히 수면 위로 부각된 이유다.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 성추행 피해자들이 23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 모여 대응을 논의하고 있다. 문단에서 성희롱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가 지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여성 작가 등에게 신체 접촉을 가했음을 시인하고, 이를 반성하고 사과하는 차원에서 모든 직위와 프로젝트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2016.10.23/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 성추행 피해자들이 23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 모여 대응을 논의하고 있다. 문단에서 성희롱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가 지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여성 작가 등에게 신체 접촉을 가했음을 시인하고, 이를 반성하고 사과하는 차원에서 모든 직위와 프로젝트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2016.10.23/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일방적 폭로전은 안돼…재발방지 계기로 삼아야"

문화예술계 성희롱 및 성추행이 유독 많은 또 다른 이유로는 다른 직군에 비해 신체접촉이 많고 술자리가 잦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술계 또 다른 인사는 "음악, 무용, 미술 등 예술계 환경이 도제식으로 배우며 함께 먹고 자는 등 사제간, 선배와 제자간 유대가 끈끈하다"며 "특히 실기를 할 때 신체가 밀착되는 일이 잦아 자칫 성추행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또 "예술계 사람들이 일반인들보다 끼도 많고, 감정 표현이 자유분방한 측면이 있다"며 "특히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밤에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전시를 앞두고 밤늦게까지 작업하다 술자리가 이어지는 경우도 잦은데, 그러다가 일방적인 스킨십이라던지 잘못된 행동들이 표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했다. 

함 씨 사건을 계기로 트위터 등 SNS에서는 해시태그를 이용해 과거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는 폭로성 글들이 봇물 터진 듯 올라오고 있다. '김 모 영화평론가가 미성년자들을 꼬드겨 강간했다'거나, '예술 고등학교 사진과 재학시절 사진작가였던 한 선생님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등의 글들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일방적 폭로전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한국미술관협회장)은 "미술계에 만연해 있던 성폭력 사건들이 이번 기회에 공개적으로 정화될 필요가 있다"면서도 "일방적 폭로로 망신주기나 마녀사냥을 하기 보다 사후 재발방지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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