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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밥 혹은 몸'…류근 시인 둘러싼 '여혐' 논란, 왜?

페미니즘 평론가들 "여성에 낭만적 태도도 여혐"
"문학을 정치적 잣대로만 판단해선 안 돼" 반론도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6-09-19 19:34 송고 | 2016-09-20 10:29 최종수정
류근 시인(류근 제공)
류근 시인(류근 제공)

'그의 시에서도 여자는 밥 혹은 몸이다.'
지난 추석 연휴 내내 류근 시인을 둘러싼 '여성 혐오'(여혐) 논란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달궜다.

한 일간지에 '익명이지만 류 시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아 한국문단의 '여혐' 분위기를 비판하는 칼럼 기사가 게재된 후, 류 시인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온라인에서 '대표 여혐 시인'으로 지목되며 거센 비난을 받은 것이다

류근 시인은 TV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의 고정 패널로도 출연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어떻게든 이별'(문학과지성사)이라는 두번째 시집을 펴내 인기를 얻고 있다. 가수 고 김광석이 부른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작사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온라인에서 류 시인 개인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이 기회에 한국문단 내의 뿌리깊은 가부장적 풍토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자'는 자성의 목소리까지 나오는 모습이다. 한국 문단이 류근 시인 논란을 통해 여성 시인들에게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는 가부장적인 문단 문화를 돌아보고, 문학작품 속에도 들어 있는 여혐 코드를 자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일부 문인들은 문학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가지 잣대가 있을 수 있는데, 가장 강력한 '정치적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작가들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류근 시인, 여혐으로 공격받은 이유 들여다보니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류근 시인은 이처럼 낭만적이고 애틋한 사랑의 시들을 주로 써왔다. 스스로를 '삼류 트로트 연애시인'이라고 부르며 '죄라고는 사랑한 죄밖에 없는 가난한 시인'을 시적 화자로 자주 내세웠다.

일부 시에서는 '아내 몰래 7년을 끌어온 연애가 끝이 났을 때'라든가 '마누라가 준 용돈으로 용돈 준 여자가/ 다른 남자랑 공항버스 타고 사라지는 뒷모습 보고 와서' 등 일반적인 도덕관념과는 거리가 있는 문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류 시인을 둘러싼 '여혐' 논란은 지난 16일 한 일간지 칼럼 기사에서 비롯됐다. 칼럼은 어떤 시인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한 시인이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라고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의 시를 기사화하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칼럼에선 익명으로 처리됐지만 '자신의 시를 통속시라고 했다' '죄라고는 사랑한 죄밖에 없는 나(시인)' 등의 대목으로 인해 지칭하는 해당 시인이 류근이라는 사실을 문학 팬이라면 추론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칼럼은 그 시인의 시집 출간을 기사화하지 않은 이유로 그의 시가 여혐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류 시인의 시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에 대해 '여자가 해준 밥을 먹고, 여자의 몸을 품평하고, 여자가 던진 원망의 눈길을 변명삼아 다른 여자에게로 이동하는' 식의 낭만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 속에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있다'고도 했다. 나아가 문예지 '21세기 문학에 실린 김현 시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국문단에서 보이는 성차별의 현황도 비판했다.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들게 하고 술에 취하면 여자시인들에게 성적인 욕을 퍼붓고 젊은 여자 후배 시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성적선호도 매길 것을 제안하는 시인 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간 지 얼마 후 류근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주어 빠진 기사가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도 있겠구나"라며 "구체적 근거(작품 인용)도 없이 개인적 지레짐작만으로 (자신과 자신의 시를) 여혐에 대한 총알받이로 썼다"고 개탄의 글을 올렸다.

해당 기사와 류 시인의 반응은 SNS상으로 번져나갔고 류근 시인의 팬들은 "낭만적인 그의 시가 '여혐'은 아니지 않느냐"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자  일부 누리꾼은 '여혐'의 근거가 되는 시라며 시인이 수년전 낸 첫 시집의 일부 시를 실어날랐다.

'과거를 ( )하는 능력'이라는 제목의 시 속 '그동안 내 여자를 조립식 침대처럼 눕혔다 엎었다 앉혔다 잘 길들여준 남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고 쓴 시구 등을 예로 들며 "여성을 사물화했기에 '여혐'"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은 문학평론가들과 작가들이 SNS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더욱 뜨거워졌다.

오길영 문학평론가는 류근 시인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어설픈 폼잡기' '포즈취하기' '객기 부리기' 등을 벌이는 시인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기사의 문제의식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 김명인 문학평론가는 류근 시인에 대해 "진지하고 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에 대한 비판을 대할 때, 비판의 핵심을 파악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류근의 시가 "여성보호, 여성존중, 여성애착 등 겉보기에 매우 여성친화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성역할을 고착화하고 남성지배 구조를 영속화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여성혐오'"라면서 "이는 페미니즘에서는 상식적인 견해"라는 설명도 더했다.

하지만 이같은 날선 비판에 대해 일부 작가들은 입장을 달리 했다. 소설가 이외수는 "평론가란 전봇대만 보면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고 싶어하는 개와 흡사하다"고 한 오스카 와일드의 독설을 인용하면서 창작에 대한 평론가들의 과도한 개입을 경계하는 의미의 글을 올렸다.

소설가 신승철 역시 "한국문학에 당연히 활발한 비평이 가해져야 하지만 자본주의에 힘입은 블록버스터에 맞서는 한국영화처럼 배려나 격려가 선행해야 한다"면서 과도한 도덕적 압력이 문학에 가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한국문학의 여혐 뿌리 깊지만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전문가들은 한국문단에서 '여혐'으로 비칠 수 있는 작품들과 문인들의 행동이 그간 꾸준히 있었지만, 이번 '류근 시인 논란'처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전면적으로 비판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수년전 작고한 한 시인의 경우처럼 여성문인을 상대로 저지른 성추행 등의 '여성혐오'적인 행동은 그간 문단에서 추문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21세기문학' 가을호에 김현 시인이 '질문 있습니다'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문단의 일부 남성시인들의 '여혐' 행태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하지만 여혐 '행동'들에 비해 여혐 '문학'은 구별이 어렵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많은 독자와 동료 문인들이 "낭만적인 류근의 시는 여혐은 아닌 것 아니냐"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페미니즘 계열 평론가들은 이런 반론에 대해 '여성혐오'뿐 아니라 '여성숭배' 등도 여성에 대한 차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오혜진 문화평론가는 "'여성혐오'란 여성을 타자화하는 인식구조를 말하는 것"이라면서 "어머니나 딸에 대한 지나친 숭배, 다양한 상상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예찬하는 것 등도 다 여성혐오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추억하는 시들, 어머니를 '대지'처럼 편안하고 늘 주기만 하는 존재로 그리는 시들 역시 어머니를 주체적 존재로 보지 못하고 남성 위주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여혐'이 된다고 게 페미니즘 비평가의 견해다.

이런 잣대에 따르자면 가부장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 김수영 시인의 시들이나 부인 몰래 다른 여인을 만나 위로를 얻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 등의 걸작까지도 여혐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김수영은 '죄와 벌'이라는 시에서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우리들의 옆에서는/어린 놈이 울었고/(중략)아까운 것이/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면서 아내를 폭행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여혐' 행동을 보이는 시적 화자를 담고 있다. 또 어머니를 추억하는 대부분의 서정시들 역시 페미니즘 잣대의 여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오혜진 평론가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작품들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며 여혐의 요소가 있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엇이 여성혐오인지 문단이 합의하는 것부터 시작해 여혐이 어떤 방식으로 문학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지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덧붙였다.

강동호 문학평론가는 "여혐이 문단 내에서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 다른 부문보다 더 심하다거나 문학사가 여혐으로만 점철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며 "다만 문단 내 가부장적 행태에 대한 문제제기는 타당하며 문학 속의 여혐 역시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소설가 신승철은 "여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류근의 시를 '여혐'으로 몰고가는 것은 도가 지나쳤다"면서 "'독자와 평론가들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한 가지 잣대만 사용해 시가 가진 진정성을 읽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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