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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쇼크]영국은 어쩌다 떠나게 됐는가

43년간의 회의론, 이민 물결 그리고 …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2016-06-24 20:30 송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24일(현지시간) 집무실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기자회견에 임했다. 전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찬반 국민투표에서 유권자들이 브렉시트를 선택하자 이날 캐머런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캐머런 총리는 그 동안 브렉시트 반대 유세를 이끌었다. © AFP=뉴스1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24일(현지시간) 집무실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기자회견에 임했다. 전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찬반 국민투표에서 유권자들이 브렉시트를 선택하자 이날 캐머런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캐머런 총리는 그 동안 브렉시트 반대 유세를 이끌었다. © AFP=뉴스1


영국이 유럽을 떠나기로 선택한 것은 지난 4개월 격렬했던 유세의 결과라기보다는 40년간 사라지지 않고 잠재돼 있던 유럽회의주의가 응축돼 분출된 것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4일(현지시간) 진단했다.
유럽회의주의자들은 1973년 영국이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한 이후 줄곧 탈퇴를 외쳤다. 당시에 EEC 탈퇴는 10년간 노동당의 공식 정책이 돼야 했을 정도였다. EEC 가입을 이끈 보수당 내에서도 상당수가 유럽에 포용적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분위기는 존 메이저 총리(1990~1997)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토니 블레어 총리(1997~2007) 집권기에는 잠잠했지만 2000년대 말에 경기가 나빠지자 유럽회의주의 정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0년 국정을 맡게 되면서 보수당에서 "유럽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것"을 자제시키려 했다.

하지만 영국독립당(UKIP)의 등장, 엘리트 기성정치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민자에 대한 불만을 배경으로 EU 탈퇴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감에 따라, 국민투표를 부쳐야 한다는 당내 의원들의 압박을 거부하지 못했다.  
캐머런 총리가 2013년 EU 탈퇴 찬반을 국민에게 묻겠다고 밝힌 뒤, 2012년 처음 등장했던 신조어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는 소수가 집착하는 대상에서 성공적인 주류 정치권 운동으로 탈바꿈했다.

◇유럽회의주의 성향의 의원들

캐머런 총리는 취임한 이후 유럽회의주의 성향의 의원들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유럽의회 내에서 연방주의 성향의 중도우파 유럽국민당그룹(EPP)을 이탈한 것은 이중 하나다.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 AFP=뉴스1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 AFP=뉴스1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2011년 10월에 보수당 의원 81명이 EU 탈퇴를 놓고 국민투표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전후 유럽에 관한 최대의 반란이었다.

캐머런 총리는 그해 말에 EU 예산 증액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마가렛 대처 전 총리 방식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일은 반(反)EU 정서만 더욱 부채질했다.

그해 12월 보리스 존슨 당시 런던시장은 캐머런 총리에 대해 영국과 EU간 관계에 대해 재협상에 나선 뒤 국민투표를 실시하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이에 캐머런 총리는 2013년 1월 EU와 재협상을 약속하면서 2017년 말까지 국민투표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당시, 캐머런 총리는 이 같은 약속을 통해 보수당 내 유럽회의주의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고 과신했다.

또 당시에는 보수당이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치를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캐머런 총리는 국민투표 약속 등에 힘입어 승리를 거뒀고 퇴로는 막혔다.

◇난민 문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브렉시트 찬성 유권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이민자 유입 규모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와 맞물려 유세가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국민투표는 자유무역에 대한 대가로 자유 이동을 수용하는 것이 행복한가에 대한 것으로 초점이 바뀌었다.

캐머런 총리는 2010년 선거 전에 이민자 수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015년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리더십에서 내상을 입었다. 또 영국 정치인들은 EU로부터 난민 유입을 통제하는 데 무력하다는 인식을 남겼다.

브렉시트 찬성 진영은 이민자보다는 경제와 주권 문제를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민자 문제와 관련해 "통제권을 되찾는 것"이 가장 효과가 큰 메시지라는 점을 찾아냈다. 그래서 난민 문제를 초등학교 부족, GP(1차 의료기관)등록 어려움, 낮은 임금 등과 결부시켰다.

◇독립당의 부상과 존슨 전 시장의 동참

다른 요인으로는 영국이 유럽 내 위치에 관해 마지막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한 이후 40년 동안에 바뀐 EU에 대한 불쾌감도 있다. 영국은 1993년 EU가 출범이 됐을 때 이에 대해 국민들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럽 공동체의 권한은 외무, 법부, 경찰 등으로 확대됐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지지한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UKIP) 대표가 24일(현지시간) 런던 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발표된 국민투표 최종결과 찬성(브렉시트)이 51.9% 득표율로 반대(48.1%)를 누르고 압도했다.© AFP=뉴스1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지지한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UKIP) 대표가 24일(현지시간) 런던 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발표된 국민투표 최종결과 찬성(브렉시트)이 51.9% 득표율로 반대(48.1%)를 누르고 압도했다.© AFP=뉴스1


브렉시트 진영은 EU는 권한을 확대하고 경제 통합을 촉진하려고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는 당초 영국 국민들이 선택한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번 국민투표는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 기성정치권에 대한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 반란이 확산돼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는 점도 간과돼선 안된다.

아울러 영국독립당(UKIP)과 나이절 패라지 대표의 부상도 한 요인이다. 이 정당이 돌풍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캐머런 총리는 국민투표를 치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12년 1월, 캐머런 총리가 EU 투표 실시 계획을 밝혔을 때, 영국독립당은 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처음으로 두자릿수 지지를 받을 때였다. 또 캐머런 총리가 국민투표를 추진하지 않으면 다수의 의원들이 이탈할 것이란 분위기도 있었다.

존슨 전 시장과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이 브렉시트 캠페인을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브렉시트는 보수당 내 일부 극우 인사들과 영국독립당만 쫓았던 소수 운동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allday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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