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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시인 쉼보르스카가 보내는 작별인사 "충분하다"

[북리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 '충분하다'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6-03-02 18:20 송고 | 2016-03-02 18:38 최종수정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AFP=News1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관대하고, 너그러우니까. /그리고 탁자 위에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내 눈앞에 펼쳐 보이니까."(쉼보르스카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시 '지도'의 마지막 부분)
강렬한 상징도, 시적인 기교도 없다. 맑고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읊조리듯, 속삭이듯 시에 담는다. 시와 시인, 시와 독자, 시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이 사라지고, 무정형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강력한 '진실'을 시 곳곳에 넣어 한순간 독자를 몰입하게 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의 시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는다.
사망한 양배추를 곁들인 돼지고기 사체(死體).
모든 메뉴는 일종의 부고(訃告).
(중략)가장 서정적인 시인들조차 그러하다.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자들도
끊임없이 씹고, 삼킨다.
한때는 성장을 지속했던 어떤 대상을.

나는 이 대목에서 위대한 신들과 화해할 수가 없다.
(중략) 굶주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결백은 종말을 고한다.(시 '강요' 중에서)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의 '국민시인' 쉼보르스카의 시집 '충분하다'(문학과지성사)가 국내 출간됐다.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시집인 '여기'와 유고시집인 '충분하다'를 묶은 시집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모차르트의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고 칭송한 대로 이 책에는 나른함과 긴장, 맑고 시원한 물을 머금은 수맥과 끓고 있는 용암이 공존하는 듯하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 쉼보르스카는 유언처럼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참으로 길고, 행복하고, 흥미로운 생을 살았습니다.(중략) 운명에 감사하며,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화해를 청합니다.”

1923년 태어나 격동의 유럽 역사를 살아낸 그의 인생이 행복했을 리만은 없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국민의 20% 가까이가 죽었다. 전후에도 독재의 집권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비명과 고통의 언어 대신 간결하고 신중한 언어와 반어법, 유머가 담겼다. 동료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가 말했듯 이런 이유로 쉼보르스카의 시는 ‘위안’을 준다.

2009년 '여기'를 출간한 뒤 86세의 쉼보르스카는 다음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인은 '충분하다'로 묶을 시편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여섯편의 시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떴다.

하지만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충분하다'는 제목과 시집 속의 시들은 말 그대로 충분하다. 고통스럽고도 영예로운 인생을 산 시인이 자신에게,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그만의 작별인사인 이 말은 책을 덮자 더 가슴이 차오르는 듯한  '충분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최성은 옮김·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 News1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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