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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영화읽기]포인트브레이크-극한의 액션, 철학을 입다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 2016-01-16 09:00 송고
 
 

'인간의 존엄성'이란 개념은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거다.

그렇지 않나. 우리 인간들 외에는 인간이 존엄하다고 인정해준 존재는 아직 없다.

신(神)도 직접 말한 적은 없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 쓰여 졌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가 조금 특별하긴 하다.

여전히 푸른 행성 지구의 자연 파괴를 일삼는  암적인 존재일 지도 모르지만 광활한 우주와 아름다운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알아봐 주는 인간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이름까지 붙여주는 인간이 있기 때문에 만물은 더욱 빛이 난다.
    
 
 

그랬거나 말거나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재고의 여지가 필요해 보인다.

사실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까닭은 이 지구상에서 지금 가장 힘이 센 종족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스스로 존엄하다고 자화자찬(自畵自讚)을 해도 꾸짖을 사람이 없는데 뭔들 못하겠나.

지구촌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인간에게 지금은 분명 문명화된 세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먹이가 되고 있는 다른 종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전히 야만의 시대가 아닐 수 없다.

권력이란 게 그렇다. 약자의 고통은 쉬이 잊게 만든다. 착한 권력은 잘 없다.

인간이란 종족도 비교적 나쁜 권력에 속한다. <아바타>에서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은 생존을 위해 다른 종족을 죽일 때 용서를 구하고 감사할 줄 알지만 우리 인간들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감사의 표현을 해도 신에게 하지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 고기와 생선, 야채들에게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오늘 저녁 밥상에 올라 온 그들은 절대 강자인 인간들에게 바쳐진 약자의 제물 같은 게 아니던가.

그렇게 인간은 지금껏 다른 종족들의 죽음을 통해 삶을 영위해 왔다. 희생된 제물들의 고마움도 잘 모른다.

해서 세계적인 석학 '밀란 쿤데라'도 일찍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소설에서 이런 달변을 쏟아냈다.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해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여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라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한 유일한 것이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한다면 끝장이다. 신이 '너도 다른 모든 별들에 있는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성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 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사설이 너무 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25년 만에 리메이크 된 <포인트 브레이크>는 이렇듯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볼 경우 <포인트 브레이크>는 포르노그래피가 되어 버릴 수 있다.

포르노가 대체로 벗는 이유 없이 섹스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듯 <포인트 브레이크>도 '익스트림 스포츠'란 소재를 통해 그저 현실에서는 감히 접하기 힘든 극한의 액션 장면들만 보여주려는 영화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화끈하고 시원한 액션장면들은 장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이다.

하지만 조금 깊게 영화를 들여다보면 <포인트 브레이크>는 아주 영리한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특히 일반인들은 미쳤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목숨을 건 그들의 도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철학적으로 도약하려 한다.

물론 감독의 그러한 의도를 이해하는 건 전적으로 관객의 몫. 영화도 가끔 책처럼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역시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다. 가진 힘에 따라 생명의 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분명 지금 이 지구상에서 인간의 죽음과 여타 종족의 죽음은 그 의미가 다르다. 지나가던 개미가 고의든 과실이든 인간에 의해 밟혀 죽는다고 경찰이 수사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나 개미나 지구상에 공존하는 같은 '생명체'다.

<포인트 브레이크>에서 보디(에드가 라미레즈)가 대자연에 미안해하는 이유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솔직히 힘 좀 세다고 부단히도 대자연을 괴롭혀왔던 게 우리 인간들 아니던가. ‘대자연 대 인간’이 아니다. ‘대자연 속의 인간’이다.

그래서 보디의 위험천만한 도전은 대자연 앞에 ‘속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목숨을 건 오자키의 8가지 과제 수행을 통해 그는 스스로 대자연의 제물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도 그저 대자연의 일부에 불과함을 세상에 알리려는 과정이기도 했다. 
    
 
 

죽음은 자연의 섭리로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인간들은 존엄성의 착각에 빠져 너무 큰 일로 생각해왔다.

밥상 위에 올라오는 수많은 다른 종족들의 시체들을 대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죽음은 다르고 특별하다는 생각.

오만한 대다수의 그런 인간들과 달리 보디 일행은 바람을 타고 나는 새처럼, 혹은 거대한 파도에 올라 탄 나무판때기처럼 ‘인간’을 포기했다.

그러다 절벽에 부딪히거나 파도에 휩쓸려 죽더라도 그건 그냥 새와 나무판때기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보디가 과제 수행 도중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무덤덤했던 이유다.

반면 주인공 유타(루크 브레이시)는 일찍이 동료의 죽음 앞에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보디를 만나 그들의 위험천만한 도전에 동참하면서 스스로 구원받게 된다.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에서 악의 세력인 사우론의 대대적인 공습을 앞두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는 피핀(빌리 보이드)에게 마법사 간달프(이안 맥켈런)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일 뿐이야.”

<포인트 브레이크>에서 보디도 과제 수행 도중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어가는 동료를 향해 무덤덤하게 말한다.

"곧 만나자(See You Soon)"

이 영화, 생각보다 거대하다.

7일 개봉. 러닝타임 114분.

자료협조: 롯데시네마 울산관


lucas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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