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연인의 미소를 바닷속에 새긴 남자 이야기…'범섬 앞바다'

[북리뷰] 홍상화 경장편 소설 '범섬 앞바다'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6-01-08 11:39 송고
© News1
그는 손전등으로 그가 조금 전에 갔었던 벽쪽을 비췄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여인의 전신 조각상이었다. 여인은 그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본문 239쪽)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그 여자가 전생에서는 어머니였고 후생에서는 딸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그녀의 미소는 아름답고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와 짧은 사랑만을 나누고 옛애인에게 떠난다.

그럼에도 남자는 자신을 떠난 여자와 한 약속, 자신이 죽으면 뼛가루를 제주도 범섬 앞바다에 뿌려달라고 한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지킨다. 잠수병으로 다리가 불구가 되는 불행을 당하면서도 그녀의 미소를 물 속 바위에 새겨넣은 것이다. 다른 남자에게로 떠났음에도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마음 속에 살아있다는 의미로.

소설가 홍상화의 소설 ‘범섬 앞바다’(한국문학사)는 지나치게 쉽고 빠른 인스턴트 식 사랑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순수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소설 속 사랑은 순탄하지 않다. 소설가인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 운동권 남자인 그는 경찰에 잡혀 고문 받던 중 난로를 껴안아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져 버린다. 이들의 사랑은 엇갈리면서 매우 뜨겁고 격정적이다. 1980년대산(産) 뜨거운 정서가 담겼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가 이 작품의 씨실이라면 더 중요한 날실이 있다. 바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순정한 열정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대중소설가인 주인공이 겪는 정신적인 공황 상태, 그리고 그 절망에 찬 읊조림들일 것이다.

탁월한 단편소설들을 쓰던 주인공은 신문 연재소설을 쓰면서 유명해졌지만 끝모를 자괴감과 분노심을 함께 얻는다.

그때 나는 불멸의 단편소설 하나 남기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다. 명예도, 부도, 대중적 인지도도, 다른 아무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때 나는 가난했고 무명이었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그때는 누가 뭐라 해도 진정한 소설가였다.(본문 9쪽)   

주인공은 현실에 목소리를 높이는 참여문학 작가들에게도, 고고한 작품을 쓰는 문단인사들에게도 분노한다. 하지만 자신 역시 옛날만을 생각하고 작가노트를 뒤적이며 갈피를 못잡는 작가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수십년이 흐른 후 '범섬 앞바다'라는 작품으로 완성된다.

글로는 차마 옮기지 못하고, 물속에 새겨넣었던 그의 사랑이 글로 옮겨지는 과정은 오랜시간 좋은 소설 쓰기를 갈구했던 그의 삶의 완성이기도 하다. 사랑의 고통과 방황 속에서 벼려진 인생을 통해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사랑이 바로 최고의 예술이에요. 예술이란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지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잔인함까지도……. 사랑이 바로 그런 거지요."(본문 137쪽)

사랑과 문학, 예술의 문제를 함께 직조했기에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이야기에서 벗어나 이같은 풍부한 입체감과 깊이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이정훈의 입과 눈을 통해 전해지는 홍상화 작가 자신의 고통과 고민이 작품 곳곳에서 번뜩이면서, 그리고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무늬로 더해지면서 이 작품은 여러 층위의 해석과 감상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홍상화 지음·한국문학사·240쪽·7000원)


ungaungae@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