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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 45주기 ‘아름다운 청년’의 서울 발자취

상경해 염천교 부근 첫 거처…가난 속 15곳 옮겨 쌍문동으로
청계천 복원때 만든 전태일다리·기념동상 '서울시 미래유산'
동생 전태삼씨 "노동자 생존 보장되는 세상 만들기가 최우선"

(서울=뉴스1) 장우성 기자 | 2015-11-13 06:00 송고 | 2015-11-15 13:47 최종수정
1969년경 전태일 열사(오른쪽 두번째)가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생들과 찍은 기념사진. 전태일은 당시 학창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상한 바 있다.(도봉구 제공)© News1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일요일은 쉬게 해달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3일로 딱 45년전인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 청계천 평화시장 입구에서 전태일 열사(1948~1970)는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채 이렇게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대로 이후 노동자의 권익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분신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연설에서조차 노동환경 문제가 비중있게 언급될 만큼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청계피복노조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조합도 결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이정표가 됐다.

대구가 고향인 전태일은 6·25 때 피난을 간 부산에서 살았다. 여섯살이 되던 1954년 양복제조업을 하다 빚더미를 짊어진 아버지와 가족과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한때 대구로 돌아가 살기도 했으나 22년의 짧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청춘기 대부분을 보낸 서울 곳곳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태일 가족이 서울에 와 처음 자리잡은 곳은 서울역 앞인 중구 염천교 부근이다. 판자집 처마 밑에 몸을 맡긴 채 서리를 피하는 데 만족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후 현재 지하철 회현역 부근, 힐튼 호텔 자리 등의 천막과 판자집에서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그나마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이태원 미군부대 근방, 동대문구 용두동으로도 옮겨다녔다. 전태일의 친동생인 전태삼(65) 씨는 "화전민, 철거민, 노숙민 등의 처지로 옮겨다녔던 곳이 서울에서 15군데 정도 될 것"이라고 회상했다.

한때 뿔뿔이 흩어져 삶을 잇던 가족들은 현재 남산케이블카 정거장 아랫쪽에 있던 판자촌 아파트에서 다시 살림을 합쳤다. 그 건물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호텔을 지으려 골격을 세웠다가 건립이 취소돼 방치된 건물이었다. 그러나 1966년 대형 화재가 일어나 그나마 있던 삶의 터전마저 사라져버렸다. 이후 도봉산 부근 하천 백사장에 있던 난민수용소를 거쳐 도봉구 쌍문동의 당시 '남산동 화재민촌'이라고 불리던 판자촌에 둥지를 틀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2011년 작고) 여사가 1988년 당시 쌍문동 208번지 판자촌에서 찍은 사진. 이곳은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전태일 옛집터를 알리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전태삼씨 제공)© News1

이곳이 현재 전태일 옛 집터 표지석이 세워져있는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다. 전태일은 여기서 1969년 부친상을 치렀고 재단 노동자로 일하던 청계천 평화시장까지 2~3시간을 걸어 출퇴근했다. 1988년 재개발돼 현재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이 들어서 동생 전태삼씨가 지금까지 살고 있기도 하다.

도봉구는 전태일의 쌍문동 집터에 표지석을 세워 고인을 기리고 있다. 이 옛 집터를 벽초 홍명희,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위당 정인보, 시인 김수영, 민주화운동가 계훈제의 옛 집터와 함석헌 기념관, 간송 전형필 가옥과 함께 역사탐방코스인 '도봉 현대사 인물길'로 조성해 놓고 있다. 

또 종로 파고다공원 부근은 궤짝을 고쳐 잠자리를 만들고 구두닦이, 신문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리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가 1960년 3학년으로 전학해 잠시 다녔던 중구 남대문로 남대문초등학교는 1979년 폐교돼 그 자리에 상공회의소 건물이 들어서있다.

분신장소인 평화시장 입구 앞 청계천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는 전태일 기념동상과 거리가 조성돼있다. 설치미술가 임옥상씨의 작품인 동상 주위에는 건립 성금을 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 400여장이 깔려있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입구 전태일 다리에 있는 전태일 기념동상. © News1

35주기인 2005년 건립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을 벌이던 서울시는 "다리 이름을 현대사 인물명으로 한 전례가 없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2010년에서야 버들다리와 전태일 다리를 병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올해 3월에는 이 거리 일대를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보전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2003년부터 전태일기념관 건립을 모색했으나 서울에서는 마땅한 부지를 찾지 못했다. 최근 대구 시민 300여명이 참여한 '전태일 대구시민문화제 추진위원회'는 전태일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꼽는 청옥고등공민학교 재학 시절 살던 중구 남산동 집을 보전하고 기념관을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전태삼씨는 기념관을 짓고 추모사업을 벌이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고 강조했다. 바로 '전태일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태일이 형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울부짖음이 지금도 청계천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더이상 노동자가 죽지않고 비정규직으로 고통받지 않고, 안정된 고용과 생존이 보장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먼저 힘을 모아야 합니다."


never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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