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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라고 말하는 그리스를 위한 변(辨)…두번째 이야기

최종일의 [세상곰파기]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2015-07-07 19:05 송고 | 2015-07-07 20:02 최종수정
연금을 제때 받지 못한 한 그리스 장년 남성이 은행문에 손을대고 고민에 빠져 있다. © AFP=News1
연금을 제때 받지 못한 한 그리스 장년 남성이 은행문에 손을대고 고민에 빠져 있다. © AFP=News1


"유럽은 돈이 지배한다. 이것은 거대 거미 같은데 거미줄에 걸리게 되면 가망이 없다...우리, 그리스인들은 많은 것을 이룩했지만 고대부터 반역은 종종 내부에서 나왔다. 정부의 전임자들은 모든 것에 서명해 그리스의 귀중한 자산을 팔아치웠고 (볼프강) 쇼이블레(독일 재무장관)가 대장이라고 말했다"
 
그리스가 낳은 세계적 작곡가이자 굴곡진 그리스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지난달 말 외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당시 테오도라키스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에게 역대 지도자들의 길을 쫓지 말고 국제 채권단의 제안에도 서명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전했다.

(테오도라키스의 삶과 함께 그리스가 반대하는 저변의 배경은 첫번째 이야기격인 <'오히'라고 말하는 그리스를 위한 변(辨)…굴곡과 저항의 역사>에서 다뤘다. http://news1.kr/articles/?2112720  에서 볼 수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원로의 조언대로 치프라스 총리는 전임 총리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채권단의 협상안에 고개를 가로 저었고, 지난 5년 동안 가혹한 긴축이 남긴 깊은 생채기를 껴안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국민들에게 수용 의사를 물었다.

치프라스 총리는 채권단의 협상안이 "굴욕적인 것"이며, 이들이 돈줄을 막아서 국민들을 "협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민들 다수는 치프라스 총리를 지지했다. 5일 협상안 수용 여부를 묻는 투표에서는 61%가 넘는 국민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긴축으로 고통이 더욱 큰 세대와 직업군의 반대가 두드러졌다. 24세 이하 청년들 85%, 민간과 공공 근로자 71%, 구직자들 72%가 반대를 선택했다.
반대를 선택하면 그리스가 국가부도(디폴트) 사태에 빠지고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유로존 정상들의 잇단 경고도 빛이 보이지 않는 참담한 현실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있는 국민들의 귀에는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스의 연도별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출처: 세계은행> © News1

지난 2010년 5월 구제금융을 처음 받았고, 2012년 2월에는 2차 자금도 지원받았다. 채권단의 요구는 공공지출을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세계 주요 매체가 전파한 '복지패망론'은 정당성을 부여했다. 한동안 잡음이 터져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리스는 채권단의 요구 조건을 대체로 따랐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지난 4년 동안 국가경제 규모(GDP)는 20% 이상 줄었다. 실업률은 2010년 이전까지 10%를 조금 못 미치는 수준에서 2013년엔 27%를 웃돌았다. 청년 실업률은 50%를 넘는다. 이뿐만 아니다. 사회전체적으로 삶의 질은 크게 악화됐다. 정부의 1인당 보건지출은 2008년 연 3000유로 수준에서 2013년에는 2000유로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급락했다.

경제가 깊은 불황으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GDP 대비 170%가 넘는 부채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게으르다'고 손가락질 받는 그리스 국민들의 탓일까. 그렇지 않다. 유로존이라는 유럽통화동맹(EMU)이 가진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유로존 시스템을 보자. 조세와 예산집행권은 개별국이 갖고 있고 통화만 같이 쓴다. 경제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그리스는 평화절하에 나서 자국 상품이 해외에서 보다 값이 싸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경기부양을 위해 엔화 약세를 유도하고 있는 일본과 같은 행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는 상대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높으면 부채 부담이 감소돼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독일은 인플레이션 촉진 정책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리스 연도별 경제규모(GDP)와 실업률 추이(단위: 유로, %) <출처: 세계은행> © AFP=News1
그리스 연도별 경제규모(GDP)와 실업률 추이(단위: 유로, %) <출처: 세계은행> © AFP=News1

아울러 한 국가 내에서는 부자 지역의 수익을 세수를 받아 그렇지 못한 지역을 지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부가가치 산업이 한 곳에 들어서면 다른 지역은 이를 쫓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정부는 세금을 받아 다른 가난한 지역을 돕는다. 유로존도 온전한 공동체가 되려면 이를 적용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한 국가로 가려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독일과 네덜란드 등 부유한 북유럽 국가의 납세자들은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에 대한 지원을 완강히 반대한다.

근본적 결함에 대한 논의없이 유로존 강국들은 그리스를 막다른 길까지 내밀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허물어지고 경제가 최고의 가치가 됐다. 지난 5년간의 과정을 보자.

그리스는 유럽 민간 은행들에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막대한 빚이 있었다. 유럽 정부들은 그리스가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져 자국 은행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보다는 그리스 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 은행들에 부채를 갚도록 했다. 이로 인해 그리스는 해외 정부와 기관들에 막대한 채무를 지게 돼, 정치적으로 종속됐다. 그리스에는 돈을 갚을 수단이 없고 해외 정부들은 그리스를 통치할 수 없다는 본질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수년 동안 그리스는 채권단에 끌려왔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의 칼 휄란 교수는 현재의 사태는 그리스 국민들이 더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맞서 일어서면서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그리스는 정부는 공공정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유럽 파트너국가들은 돈을 원한다면 의무 이행사항들을 따르기를 요구하면서 충돌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의 그의 설명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 AFP=News1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 AFP=News1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 5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그리스 국민들이 '반대'를 선택한 것은 "유럽, 그리고 유럽의 정신이 크게 승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 대중들에게 겁을 줘서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하게 할 뿐 아니라 정부를 제거하려는 협박과 위협에 그리스가 분연히 맞서는 것을 지켜봤다. 이는 현대 유럽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순간이었으며, 이것이 성공했다면 진실로 추한 선례가 됐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지난 1990년대 후반, 그리스 정치권은 명확한 비전도 없이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통계를 조작해서까지 유로존 가입을 이끌었지만 단일통화의 위험성은 깨닫지 못했다. 유로존 가입 후 차입이 수월해지자 저금리를 만끽하며 정부는 해외자금을 마구잡이로 끌어왔고 국민들은 다가올 재앙은 생각하지 않고 연일 돈쓰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현재의 고통은 당시 '흥청망청 파티'가 남긴 측면이 크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긴축만이 유일한 답은 아니다. 연금을 줄이고, 세제를 개혁하고, 노동시장을 더욱 유연화한다고 그리스 경제가 살아날까. 지난 5년간 그리스가 걸어온 길이 이에 대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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