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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에볼라 공포에 영화 '괴물' 닮아가는 미국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2014-10-28 15:11 송고
 

어느 날 식인 괴물이 한강에서 나타나 시민들을 해치자 정부 당국은 이 괴물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병균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격리시킨다.
봉준호 감독의 우리 영화 '괴물'에 나오는 장면이다. 딸을 괴물에게 납치당한 송강호(강두 역)는 피해자이다. 하지만 공공의 위협앞에 그는 그저 한 명의 감염의심자로 국가 안정을 해치는 가해자일뿐이다. 국가 기관이라는 공권력은 공포의 강도에 점차 전제주의, 관료화하고 개인의 인권은 그속에 사그라 들고 만다는 풍자가 이 영화를 즐기는 관전 포인트중 하나이다.

최근 미국에서 이와 흡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서의 '괴물'은 에볼라 바이러스이다.

지난 24일(현지시간)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 미국인 간호사 케이시 히콕스(33)는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 감염환자를 돌본 후 귀국했다가 격리 조치됐다.

히콕스는 다음날 지인의 도움으로 병원 몰래 '댈러스 모닝 뉴스' 인터넷 판에 올린 글에서 자신이 뉴저지주 뉴어크 국제공항에서 격리됐다고 밝혔다.
히콕스는 "공항 직원은 내가 열이 있다며 고압적인 자세로 나를 에볼라 환자로 취급했다"며 "격리된 후 7시간 동안 먹은 건 '그래놀라 바' 1개가 전부였다"고 폭로했다.

CNN은 26일 히콕스가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채 어떤 식으로 불편하게 생활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전했다.

히콕스는 삼엄한 경비 속에서 대학병원 건물 외부에 설치된 천막에서 지낸다. 샤워 시설은 없고, 간이 화장실은 비수세식이다. 모든 짐은 압수당했다. TV도 없고, 책이나 물품 등의 반입도 안 된다. 심지어 변호사와의 접견도 불가능하다. 종이 재질의 환자복을 입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

이쯤 되면 단순한 격리가 아니다. 교도소에서, 그것도 중죄인으로 독방에 갇혀 있는 신세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히콕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지난 24일 발표된 새로운 에볼라 방역 정책 때문이다. 뉴욕과 뉴저지주는 서아프리카 의료활동후 뉴욕으로 돌아온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가 에볼라 확진 판정을 받자 서둘러 강화된 에볼라 방역책을 내놓았다. 이 의사가 증세를 보이기전 거리낌없이 지하철을 타거나 볼링장을 간 것으로 확인돼 전염의 공포가 확산되자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이다. 에볼라 감염 환자와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모든 사람은 무조건 21일간 격리해 감염여부를 판별키로 한 것이다. 곧 일리노이주도 같은 조치를 내놓았다.

히콕스는 이 조치의 첫 대상이었다. 그러나 무조건 강제로 취해진 조치는 그를 열받게 했다. 히콕스는 "의료진이 공항에 도착해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와 싸우고 왔다'고 선언한 순간 받게 될 대우를 생각하면 두려워진다"며 "내가 범죄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국경 없는 의사회도 25일 "함께 에볼라 환자 치료를 위해 애쓴 히콕스에 대한 대우에 우려한다"고 밝혔다.

뉴저지주의 조치는 사실상 서아프리카 3국에서 에볼라 환자를 돌본 모든 의료진을 직접 겨냥한 것과 다름없다는 점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논란이 크다.

미국 의료계에선 의무격리 조치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과잉대응'인데다 심각한 인권침해를 초래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한 에볼라와 싸우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히콕스도 "정치인들의 신중하지 않고 계획성도 없는 즉흥적인 반응은 정말 터무니없다"며 "에볼라 대책은 정치인이 아닌 보건 전문가가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뉴저지주의 조치가 전형적인 행정적 탁상공론임을 정확하게 간파한 말이다. 에볼라의 현장을 체험한 전문가들이 정책 결정에서 배제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21일 격리 조치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권고안 기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조치라는 점도 이것이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결정임을 뒷받침한다.

CDC는 에볼라 환자와 접촉한 여행객들에게 자발적인 모니터링을 요청했을 뿐 격리까지 주문하진 않았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엔 에볼라 감염자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주지사는 "뉴저지주의 공중보건을 지키기 위해선 격리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이 결정은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못박았다.

23일 에볼라 환자가 발생한 뉴욕주는 당초 뉴저지주와 같은 수준의 병원 격리 정책을 발표했다가 비과학적이고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비난 여론이 일자 26일 이를 자택 격리로 완화했다.

하지만 24일 뉴저지주와 같은 수준의 조치를 취한 일리노이주는 요지부동이다. 또한 플로리다주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유사한 격리 조치는 다른 주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26일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각 주들에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은 정책들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히콕스는 당국의 대응에 불만을 제기하며 자신이 과잉 격리 조치로 인해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은 현재 소위 '피어볼라'(Fear+Ebola)의 혼란 속에 휩싸여 있다. 이는 미국 사회가 에볼라에 대해 얼마나 큰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지 나타내는 신조어다.

혼란 속에선 이성이 마비되고 집단의 논리가 개인의 인권을 압도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전쟁과 인권 유린의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 수없이 입증된 사실이다.

빌 드 블라시오 뉴욕시장은 "주 정부들은 정책 결정권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훌륭한 일을 하고 돌아온 사람을 범죄자처럼 함부로 대우하는 건 옳지 않다"고 일침을 놨다.

블라시오 시장의 표현대로 히콕스를 비롯한 의료진은 목숨을 걸고 에볼라와 싸우고 있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다. 영웅들이 잘못된 대우를 받는 것은 사회적 통념과 정의에 어긋난다.

영화 '괴물'은 국가적 재난 속에서 권력이 자행할 가능성이 있는 정보 차단, 공포 조장, 과잉 대응, 인권 유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면 안 된다.


ace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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