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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침체론은 시장에 에볼라"…두 노벨 경제학 수상자의 공방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2014-10-21 18:44 송고 | 2014-10-21 23:40 최종수정
201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 © AFP=뉴스1
201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 © AFP=뉴스1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예일대의 로버트 실러 교수가 2008년 수상자인 프린스턴대의 폴 크루그먼 교수의 '장기침체론(secular stagnation)'이 '증시의 에볼라 바이러스'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실러 교수는 1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을 통해 "전염성 강한 장기침체론이 글로벌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확산했다"며 "이로 인한 공포심이 높아져 지난달 18일 이후 증시가 6% 이상 급락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실러 교수가 크루그먼 교수에게 정통으로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 각각 미시 경제와 거시 경제를 대표하는 실러 교수와 크루그먼 교수가 이 같이 맞붙은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정부의 재분배 정책과 소득 불평등 해소를 주장해온 진보주의 학자다. 반면, 실러 교수는 주택경기의 세계 최고 전문가이며 미국 주택가격을 보여주는 케이스-실러지수의 공동 개발자다. 또한 2000년 당시 5년 후 벌어질 닷컴버블의 붕괴를 정확히 예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이 대립하게 된 이유는 실러 교수가 자신의 전공 영역인 주식시장에 크루그먼 교수의 장기침체론이 생뚱맞게 끼어들어 시장을 교란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평가된 주가를 우려하면서도 막연한 공포가 시장을 뒤흔드는 것을 경계하는 실러 교수의 입장에선 크루그먼 교수의 '장기침체론'이 눈엣가시인 게 당연하다. 

장기침체론은 글로벌 경제가 만성적 수요 부족, 투자 감소, 과소 고용의 악순환으로 인해 결국 장기적으로 침체를 겪게 된다는 이론으로 '미국의 케인즈'로 불린 앨빈 한센 하버드대 교수가 1938년 처음 사용했다.

실러 교수는 크루그먼 교수와 함께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내고 오바마행정부의  국가경제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로런스 서머스 현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이 용어를 새삼스럽게 퍼뜨린 장본인이라고 지목했다.

서머스 교수가 먼저 지난해 11월8일 국제통화기금(IMF) 회의 강연에서 '장기침체론'을 다시 꺼내들어 파문을 일으켰고, 크루그먼 교수가 그로부터 9일 후 NYT 자신의 칼럼에서 이 표현을 다시 써 공포심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최근 나타난 연이은 증시 하락세로 인해 투자자들 사이엔선 주식시장이 중대한 전환점(터닝 포인트)을 맞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불거지고 있다. 

이에 대해 서머스 교수는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글로벌 경제의 부진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 침체로 가는 악순환의 경로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실러 교수는 약세장(bear market)이 시작됐는지는 큰 의문이라고 밝혔다. 약세장은 주가가 고점 대비 약 20% 이상 폭락한 기간을 말한다.

그는 또한 단기적 시장의 움직임은 장기적 시장에 비해 전망하기가 어렵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로선 현재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러 교수는 증시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소위 '카더라 통신'을 통해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실 여부를 떠나 이는 '생각 바이러스'(thought viruses)로 규정될 수 있다"며 "이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맞먹는 치명적인 전염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실러 교수에 따르면 '생각 바이러스'로 인해 투자자들은 주가를 일방으로 밀어내는 행동을 취하고, 사람들의 소비 행위에도 영향을 주며, 이는 다시 기업 수익에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이 같은 순환구조가 수년간 계속되기도 한다.

그는 '장기침체론'이라는 단어가 '생각 바이러스'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지난 2013년 11월 이후 신문과 잡지에서 이 용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검색엔진인 구글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는 점을 증거로 제시했다. 이는 서머스 교수의 IMF 강연 시기와 일치한다.

◇ 실러 "장기침체론, 1990년대 이후 학계에선 거의 사라진 용어"

실러 교수는 지난해 86세로 작고한 경제사학자 로버트 포겔 교수가 지난 2005년 한 논문에서 장기침체론이 학계에선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용어라고 밝힌 점을 상기했다.

포겔 교수에 따르면 이 용어는 대공황 시기인 1938년에 사용됐고, 1940년대엔 사용이 더욱 빈번해졌으며, 1980년대에도 사용되다가 1990년대에 거의 소멸했다. 또한 오늘날 학계에선 장기침체론에 대한 논의 자체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다만, 이 용어가 최근 다시 등장한 건 뉴스, 회의석상에서의 패널 토론, 블로그 등에서라고 설명했다.    

실러 교수는 장기침체론이 지난 2011년 발생한 증시 급락에 일조한 '떠도는 이야기들'에 비견된다고 밝혔다.

당해 5월10일 당시 스탠다드앤푸어스(S&P) 500지수는 2009년 3월9일 금융위기 당시의 최저치보다 약 2배 증가한 상태였다. 이 지수는 5월2일~8월9일에 약 20% 하락했다.

실러 교수에 따르면 당시 급락을 조장한 것도 바로 일종의 '생각 바이러스'다. 의회가 미국 정부의 디폴트(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부채한도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된 것이다. 미국이 실제로 부도에 빠진 건 아니지만, 당해 8월5일 S&P는 사상 최초로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 '트리플 A'에서 'AA+'로 1등급 내렸다   

실러 교수는 이는 놀라운 결과였지만 당시 시장의 급락을 규명해준 분명한 설명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분명한 건 소비자신뢰도가 하락했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예일대 경영대학원이 실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개인 투자자와 기관 투자자의 폭락지수(CCI)는 2009년 금융위기 당시의 최저 수준까지 하락했다.

2011년 7월29일 나온 미시건대의 '소비자태도에 관한 보고서'는 디폴트 전망이 치명적이었던 이유를 분석했다. 즉, 투자자들이 디폴트 논쟁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심각한 경제적 여파'(dire economic consequences)가 예상된다는 경고를 수차례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과도한 개인 채무의 끔찍한 결과에 대한 경험이 결부되고, 최초의 국가부도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들이 시중에 나돌았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의회의 부채한도 증액과 함께 디폴트 관련 하락장세도 끝이 났다. 이후 증시는 다시 급등했고, 뉴스매체는 국가부도의 끔찍한 결과에 대한 공포를 높이는 일을 중단했다.   

실러 교수는 현재의 장기침체론은 디폴트 위기 때보다는 강도가 덜하지만 그 내용이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순환 고리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생각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약세장을 만들어낼 만큼 투자자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주는 보다 강력한 바이러스로 변할 것인지 여부가 앞으로의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ace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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