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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항복한 공주 공산성…백제 멸망기 유물 쏟아져(종합)

당시 생활상 담은 타임캡슐인 완전한 '목곽고' 최초 확인…나당연합군과의 전투 유추 무기류도

(서울=뉴스1) 안준영 기자 | 2014-09-23 18:28 송고 | 2014-09-24 11:27 최종수정
충남 공주시 공산성 발굴조사현장에서 공개된 백제시대 목곽고.(문화재청 제공)/뉴스1

백제 마지막 군주인 의자왕이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던 공주 공산성에서 멸망 당시 전쟁상황을 엿볼수 있는 유물이 대거 발굴됐다.

의자왕은 당시 수도인 사비성(부여) 함락 직전 탈출해 백제 군사적 요충지였던 공산성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던 지방군을 기반으로 망국의 물줄기를 되돌리려다 석연찮은 연유로 며칠만에 항복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지만 고려시대 이후로는 공산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올해 공주대박물관이 공산성에서 벌인 7차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완전한 형태를 갖춘 대형 목곽고(木槨庫)를 처음 확인하고 나당연합군과 백제의 전쟁에 쓰인 무기류들도 대거 발굴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2008년부터 실시된 공산성 백제 왕궁 부속시설 발굴 사업의 일부로 성내 부속시설 영역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진행됐다.

발굴 유물, 유적 중 우선 주목되는 것은 건물지군 북단의 대형 목곽고다. 목곽고는 목재로 만든 저장시설로 당시 생활상을 담은 타임캡슐로 불린다.

이번 유적의 경우 크기가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이며 너비 20~30㎝ 내외의 판재를 기둥에 맞춰 정교하게 제작됐다.

바닥면에서 벽체 상부까지 부식되지 않고 조성 당시 모습 그대로의 원형이 남아 있다.

특히 기둥 상부의 긴 촉이 테두리보 상부까지 솟아나 있고 내부에서 기와 조각이 다수 출토된 점 등으로 볼 때 상부에 별도의 지붕 구조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문화재청은 추정했다.

그간 백제 시대 목곽고는 대전 월평동 산성, 부여 사비도성 내에서도 발굴됐지만 심하게 훼손돼 고고 사료로서의 가치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성 목곽고는 상부 구조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목조 건축물로 당시의 목재 가공 기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백제 시대 건물 복원과 연구 등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목곽고 내부에서 출토된 복숭아씨와 목제 도구 등.(문화재청 제공)/뉴스1

목곽고 내부에서는 복숭아씨와 박씨가 다량 출토됐다. 

무게를 재는 석제 추와 생활용품인 칠기, 목제 망치 등의 공구도 모습을 드러냈다. 원형으로 중앙에 고리가 있는 석제 추의 무게는 36g이다. 칠기는 표면에 옻칠이 정교하게 칠해져 있다.

목곽고 용도에 대해 문화재청은 저장시설 또는 우물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벽면에 오르내릴 수 있는 일종의 나무발판인 말목 구멍이 있고 외면과 내부 틈새를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점토를 다진 점에 비춰 일단 저장시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지대에 물이 많이 모이는 지역에 위치한 입지성을 볼 때 우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건물지 북쪽의 저수시설에서는 백제 멸망기 전쟁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관계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완전한 형태의 철제 갑옷, 옻칠이 된 마갑(馬甲), 철제 마면주(馬面冑·말 얼굴 가리개), 마탁(馬鐸·말갖춤에 매다는 방울)과 함께 대도(大刀), 장식도(裝飾刀), 다량의 화살촉, 철모(鐵牟) 등이 대거 수습됐다.

또한 지난 2011년 발굴 당시에도 저수시설에서는 서기 645년인 '정관19년(貞觀十九年)'이 적힌 옻칠 갑옷과 말갑옷이 나왔는데 이번 조사에서도 20여자의 명문이 적힌 옻칠 갑옷이 출토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저수지 주변 건물지 대부분이 대형 화재로 폐기된 정황을 고려할 때 백제 멸망시점인 660년을 전후해 나당연합군과의 전쟁과 같은 상황이 공산성 내에서 전개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분석했다.

저수시설에서 출토된 명문이 적힌 옻칠 갑옷 편.(문화재청 제공)/뉴스1

공산성과 백제 멸망을 연결하는 고리는 백제 31대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다.

그는 660년 7월 13일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기 직전 탈출해 공산성으로 지휘부를 옮긴다. 중앙군은 무너졌지만 지방군이 건재했던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뒤인 18일 돌연 항복했고 이는 한국 고대사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와 관련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는 상반된 얘기를 들려준다.

지난 2006년 중국 당나라 시대 고도였던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백제 유민이자 당나라 무장인 예식진의 묘지명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역사학계에 논쟁의 불씨를 당겼다.

묘지명에 의하면 예식진은 백제 웅천(공주) 사람으로 당에서는 좌위위대장군을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지금으로치면 장관격인 좌평까지 오른 예다(藝多)이고 아버지 역시 좌평을 역임한 사선(思善)이다.

예식진은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 보이는 백제 대장군 예식과 동일인물이라는 게 현재 중국 및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유력설로 대두되고 있다.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의자왕 항복 당시를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니식 우장의자래항)'이라는 11자의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다.

여기서 앞 부분의 장(將)은 명사로서의 장수를, 뒷 부문의 장(將)은 동사로서 체포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백제 공산성 장수인 예식진이 의자왕을 붙잡아 당나라에 넘긴 반역행위를 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는 게 일부 학자들의 판단이다.

백제 멸망후 부흥운동이 임존성, 주류성 등 지방군을 주축으로 3년간 지속된 점, 망국의 무장에 불과한 예식진이 당나라에서 고위 관직을 하사받은 점 등이 이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는 지적이다.

저수시설에서 발굴된 철제 갑옷과 깃대꽃이.(문화재청 제공)/뉴스1

이번 조사에서는 백제 유적지에서는 처음 확인되는 말안장 뒤쪽에 세워 기를 꽂는 용도의 깃대꽂이도 발굴됐다.

이 깃대꽂이는 철로 만들어졌는데 약 60㎝의 크기로 S자 모양(巳行)으로 구부러져 있다.

삼국 시대 깃대꽂이는 합천의 옥전고분에서 가야 실물이 발견됐고 고구려는 쌍영총과 삼실총 벽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 깃대꽂이는 그동안 서산 여미리 출토 토기 문양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서 실물이 최초로 출토됨으로써 백제 기승(騎乘)문화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는 평가다.

발굴단은 제 60회 백제문화제가 진행되는 26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발굴조사 현장을 방문하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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